피카소의 장밋빛 시대 (1904~1906)
피카소의 중요한 작품에는 피카소의 뮤즈들이라 불리는 7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피카소 첫번째 뮤즈 페르낭드
절친한 친구의 죽음 후 23살 피카소는 파리의 몽마르트에 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살던 허름한 아파트에 정착한다. 그때 피카소의 인생을 바꿔준 연인을 만나게 된다. 우울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준 페르낭드 올리비에이다. 피카소와 동갑이던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일을 하고 있었다. 피카소는 새끼고양이를 내밀면서 함께 살자고 얘기했으나 그녀는 이미 유부녀였다. 그녀의 남편은 굉장히 폭력적이었고 그런 남편을 피해 파리에 도망쳐 정착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화가의 모델을 하다가 피카소를 만난 것이다.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게 되고 피카소는 정신적 안정을 찾으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 큐비즘 입체주의 탄생
이때 피카소는 페르낭드와 행복한 생활을 즐겼다. 그녀와 스페인 고솔로 여행을 떠나 정제된 유럽 미술과는 다른 원시 조각에 빠지게 된다. 피카소가 영향받은 원시 미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낸다. 20세기 미술계를 바꾸는 작품을 내놓는다.
인물의 얼굴을 보면 눈은 정면을 보고 코는 측면으로 그려졌다. 가운데 여성은 하얀색의 침대보를 덮고 있는 누워있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하단의 과일이 담겨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려진 것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을 본 한 평론가는 마치 모든 사물이 여러개의 정육면체 모양으로 깨져있는 것 같다고 해서 큐비즘(입체주의) 라는 말을 붙였고 이때부터 대상을 해체, 분석해서 추상적인 형태로 재조합하는 표현 양식 입체주의가 탄생하며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주의의 선구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피카소 두 번째 뮤즈 에바구엘
페르낭드와 동거 중 피카소는 다른 여자와도 만났다. 다양한 연애를 즐기며 페르낭드와 살았는데 페르낭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피카소는 페르낭드의 이런 생활을 좋아하지 않아 그녀에 대한 집작을 보였다. 이에 페르낭드는 자신의 친구 에바 구엘을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외출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에바구엘이 피카소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페르낭드와 피카소는 결별을 한다. 그리고 에바 구엘을 만나게 된다.
피카소 3번째 뮤즈 올가 코클로바
에바구엘은 피카소의 입체주의 화풍의 여왕이라 불릴만큼 영향을 준 여인다. 그러다 에바구엘과 만난지 4년만에 그녀는 암에 걸리게 되고 요양원에 치료를 받던 중 30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피카소는 에바구엘의 병세에 차도가 없자 새로운 여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37살 피카소에게 발레리 올가 코클로바가 나타난다.
피카소는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의 무대 의상과 세트 디자인을 맡게 되고 이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화가뿐만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그때 러시아 귀족 출신 발레니라 올가를 보게 된다. 그녀에게는 귀족적인 우아함과 세련미가 넘쳐났다. 이에 피카소는 그녀에게 구애했는데 오직 결혼을 전제로한 만남만을 허락하겠다고 했고 1918년 7월 피카소는 올가와 결혼하게 된다.
이때부터 피카소는 올가의 그림을 그렸으나 올가는 피카소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올가는 자신을 그릴때는 전과 다르게 고전주의 화풍으로 그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피카소는 자신의 화풍을 버리고 고전주의 화풍으로 되돌아간다. 또한 올가 취향에 맞게 의상도 변화를 가진다.
네 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
이후 아들 파울로가 생기고 이후 아기의 초상화나 모성을 주제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카소는 점점 올가에게 영감을 받지 못하게 되고 멀어진 피카소와 올가였다. 그러던 46살 피카소의 네 번째 연인 당시 17살의 금발소녀 마리 테레즈 월터를 지하철 역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연인 관계로 발전하여 마리 테레즈에게 받은 영감으로 자유분방해진 피카소의 화풍이다. 이때는 올가는 신경쇠약이 걸릴정도로 병적인 질투가 심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피카소는 1935년 이혼을 결심한다. 이때 마리 테레즈가 피카소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5번째 여인 도라 마르
피카소는 이혼으로 인한 재산 균등 배분이 하기 싫어서 이혼 소송을 포기하고 올가는 아들을 데리고 별거를 시작한다. 결국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는 사생아인 딸 마야를 낳게 된다. 이후 마리 테레즈 딸 마야와 함께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찌르고 있는 공격적이고 초현실적인 사진가 도라 마르를 만나게 된다.
피카소는 수동적인 마리 테레즈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도라 마르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게다가 그녀는 프랑스 명문 미술대인 에콜레 보자르를 졸업한 초현실주의 사진작가였고 그녀의 사진 작품도 피카소의 마음을 움직였다. 27살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영감을 나누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관계가 정리되지 않는 3명의 여인과 지내던 피카소였다. 이때 스페인 내전(1936~1939) 이 발발한다.
이때 피카소는 가로 7.8 m, 세로 3.5 m 규모의 대작 게르니카를 단 6주만에 완성한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바람을 피운다은 것을 알게 되고 피카소는 딸을 얻은지 1년이 되기도 전에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를 정리하며 환승이별을 한다. 그러나 도라 마르 역시 피카소의 여성 편력때문에 자주 울었는데 그런 예민하고 신경질 적인 도라 마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카소는 도라 마르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옆 테이블에 식사를 하던 여성에게 체리를 들고가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고 한다. 결국 도라 마르는 피카소의 복잡한 여자관계에 대한 심각한 정신 질환을 얻어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피카소와 도라 마르는 그렇게 해어졌다.
여섯 번째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
이후 피카소 62세때 6번째 여인 법대생이었던 지적인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였다. 도라 마르와 사귈 당시 체리를 건넨 여인이다. 이때 질로의 나이는 22살이었다. 피카소와 나이차이가 무려 40살이었다. 질로는 대단한 학벌을 자랑했지만 화가의 꿈을 꾸고 있어서 파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두 사람은 엄청난 나이차를 극복하고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당시 질로를 그린 그림이다.
피카소는 질로에게 지극정성이었고 다음해에 아들 클로드를 낳았고 그 후에 딸 팔로마도 낳았다. 평범하고 행복한 가족처럼 생활했다. 그러나 아직 올가와 이혼을 하지 안았던 피카소였기에 분륜의 화풀이로 질로를 수년간 스토킹하며 괴롭혔던 올가였다. 그러나 피카소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피카소는 또 다른 여인을 만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질로도 자신도 피카소에게 스쳐가는 여자임을 깨닫고 이별 통보를 한다. 처음으로 피카소에게 이별을 통보한 여인이기에 위로와 협박등 갖은 방법으로 질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결국 질로는 떠나버린다.
질로를 떠나보낸 피카소는 그녀가 화가로써 성공하지 못하도록 막기로 결심한다. 당시 피카소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모든 겔러리들이 질로의 작품을 사고 팔지 못하게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질로는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피카소에게 복수하기 위해 피카소의 사생활을 폭로한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17개 언어로 출판되어 이 책의 인세로 질로는 부자가 된다. 그리고 질로는 이후 안정적인 남자와 재혼을 한다.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 자클린 로크
질로와 헤어질때 피카소의 나이는 70대였다. 질로는 떠난 상태였고 부인 올가는 생활비를 계속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던 피카소는 심신 안정을 위해 도자기에 심취하게 된다. 1953년 72살 피카소는 마지막 연인 26 자클린 로크를 만나게 된다. 피카소가 다닌 도자기 공장의 주인 조카이면서 딸을 가진 이혼녀였다.
피카소는 그녀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매일 6개월동안 장미꽃을 준다. 이렇게 연인이 된 두 사람은 1961년 결혼을 한다. 올가는 64세의 나이로 사망을 한 후여서 결혼이 가능했다. 그리고 결혼 선물로 36개의 방이 있는 대저택을 선물했다. 자클린의 딸 카티를 양녀로 입적시켰다. 자클린은 피카소를 지극정성으로 대했고 말년의 피카소에게 자클린은 없어서는 안될 여인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새 피카소 작품 중 가장 많이 나오는 여인이 되었다. 자클린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만 약 400여점이나 된다.
그렇게 피카소는 나이를 잊고 작품활동을 이어나갔고 1966년 85번째 생일 기념에서 국가 주도로 파리 대규모 전시회도 열었다. 다음해 1967년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거대한 야외 조각상을 전시하기도 했다. 말년까지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던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프랑스 무쟁의 별장에서 폐부종과 심부전으로 9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유산은 경의로운 수준으로 현재 가치로 약 1조 4000억원 수준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유산 배분에 대한 유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 남은 이들은 한명의 아내, 4명의 자녀 두명의 손주가 있었다. 이에 자클린은 유산을 공정하게 배분해서 분쟁의 소지가 없도록 했다.
그리고 자클린은 피카소가 사망한 지 13년이 지난 피카소 생일날 , 피카소와 하루라도 함께 있고 싶다며 그의 무덤 앞에서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게다가 피카소의 4번째 여인이었던 마리 테레즈도 피카소가 세장을 떠나고 4년 뒤에 돌연 천국에 간 피카소를 자신이 돌봐야 한다며 목을 메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피카소는 한평생 병적으로 여성들에게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여자들을 만났다. 양다리는 기본에 친구의 애인까지 바람을 피는 일도 다반사였다. 심지어 암에 걸린 연인을 버리고 새로운 여자를 찾기 시작했고 새로운 연인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지에 작품을 보여주었으나 그러나 그의 뮤즈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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