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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소헌왕후 심씨 역적의 딸이었으나 폐위되지 않은 이유

by 365 ^^ 2022. 2. 20.

소헌왕후 

소헌왕후 심씨는 (1395~1446년) 조선 4대 왕 세종의 왕비로 청천부원군 청송 심씨의 심온과 순흥 안씨의 장녀로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소헌왕후와 세종대왕은 금실이 아주 좋았다고 알려져있다. 세종은 늘 왕후를 정중한 태도로 맞이했다고 한다.

 

kbs 대왕세종의 소헌왕후

소헌왕후와 세종 사이에는 자식이 아들 8명(문종, 수양, 안평, 임영, 광평,금성,평원,영응 대군)과 딸 2명(정소, 정희공주)을 출산했다.

 

세종 소헌왕후 가계도

 

 

 

소헌왕후가 간택된 배경 

소헌왕후의 집안 배경은 조부 심덕부(심온의 아버지)는 고려말 우왕때 이성계를 따라 정치적 뜻을 같이 했던 인물로 한양의 궁궐 과 종묘 건설의 총책임자였고 개국 공신으로 정종때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이런 배경때문에 자신이 숙모이자 세종의 고모였던 경선 공주의 추천으로 충녕대군과 혼례를 올린다. 

 

왕비 되다. 

그러나 소헌왕후는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산 것은 아니였다. 소헌왕후는 1408년(태종 8년) 당시 14세로 충녕군이었던 세종(12세) 과 혼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진 후 1418년 (태종 18년) 음력 6월 남편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경비에 오르게 되고 몇달 뒤 왕비가 된다. 세종 즉위 당시 상왕 태종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 권력은 태종에게 있었다. 

 

역적 딸되다.

소헌왕후는 세종이 힘이 없던 시절 자신의 일가가 모두 숙청을 당한다. 세종은 즉위하고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영의정으로 삼고 이때 소헌왕후는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외적을 경계했던 상왕 태종은 심온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온 사이 아버지 심온을 역적으로 만들어 소헌왕후 가족을 숙청한 것이다. 이때 세종은 어떤 힘도 쓰지 못했다.

 

 

역적의 딸이 폐위 되지 않은 이유

1418. 8월 소헌왕후는 왕비가 되었고 1418년 9월 아들(안평대군 이용)을 출산하고 한달 뒤 역적의 딸이 되었다. 이때 소헌왕후는 자식들(첫째 문종,둘째 수양대군 세조, 셋째 안평대군 큰딸 정서공주)들이 줄줄이 있었는데 가족이 역적 집안이 되어 모두가 노비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소헌왕후는 곡기를 끊고 누워있었고 남편 세종은 자신의 아버지 태종에게 항변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소헌왕후의 권위도 떨어져서 심지어 궁녀가 소헌왕후의 옷을 찟었음에도 세종이 처리를 하지 못하자 태종이 이를 해결하기도 했을만큼 남편 세종은 힘이 없었다. 

 

 

역적의 집안이라 소헌왕후에 대해서도 폐비 논의가 있었으나 왕자를 2명이나 출산한 상태였고 내조의 공이 컸으며 무엇보다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갖 출산한 상태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다행히 폐비는 되지 않는다.

 

 

내명부 수장되다

소헌왕후는 이를 모두 극복하고 세종 4년 1422년 조선 제 3대 태종이 승하하면서 상왕인 태종의 그늘을 벗어나 세종은 조선의 군주로 우뚝서게 되면서 소헌왕후 또한 내명부의 수장으로 입지를 다지게 된다. 또한 세종은 노비로 간 소헌왕후의 어머니를 복원시켰다. 또한 세종이 죽고 나서 아들 문종이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의 신분을 회복시킨다. 부인 소헌왕후와 모친 안씨를 위로하는 연회도 열어 주었다. 

 

 

소헌왕후 성격

소헌왕후는 어릴적부터 정숙하고 인자하고 온화했고 남편 세종을 이해하고 내조에 힘써 내명부를 잘 이끌었다. 조선의 성리학적 여성상이었던 소헌왕후이다. 

 

소헌왕후는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에서 나왔는데 아래로 궁인에 미치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으며 ...

 

세종실록 : 세종 28년 기사 중 


소헌왕후는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이끈 왕비로 꼽힌다. 

소헌왕후의 죽음
1422년 소헌왕후가 병이 들었을 때 세종은 신하들에게 불공을 올리라고 명했고 소헌왕후는 1424년 정소공주가 죽고 1444년 모친 안씨가 세상을 떠나고 몇달 뒤 12월 5남 광평대군이 사망, 한 달 뒤 1445년 1월 7남 평원대군까지 사망하니 잇다른 가족의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1446년 (세종 28년) 피접을 나간 수양대군의 저택에서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소헌왕후의 죽은 넋을 달래기 위해 세종이 했던 일.

 

월인천강지곡 편찬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던 세종은 직접 합장릉을 명하였고 세종은 죽는날까지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고 이후 세종은 나랏일에만 힘썻다. 유교를 숭배했던 조선이었으나 세종은 대군 시절 소헌왕후와 함께 사찰에 불공을 드리러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며 소헌왕후의 명복과 공덕을 빌며 만들었던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천강의 뜻은 부처님의 자비가 달빛처럼 중생을 비춘다는 뜻으로 이 책은 유일본 한글 활자로 간행된 악장체 찬불가(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찬불가) 국보 320호

 

불교 사찰에 수륙재 명함.  

또한 소헌왕후가 죽은 뒤 세종은 경복궁 안에 불당을 만들려고 했으나 모든 신하들이 반대를 해서 무산되었다. 이에 세종대왕은 강진 무의사와 동해 삼화사에 내탕금을 내려 수륙재를 지내게 지내게 했다. 소헌왕후의 극락왕생과 함께 전쟁,재해로 이름없이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극락보전에 수륙재를 지내기 위해 지장보살이 모셔지게 되었다. 

 

소헌왕후의 극락왕생과 전쟁,재해로 죽은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종이 명해 조선시대 시작한 수륙재
가장 왼쪽이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무의사 지장보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합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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