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가족은 역적의 가족들이었다. 할아버지 이성계는 고려를 전복시킨 역적이었고 아버지 이방원은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된 역적이었으면 세종대왕 또한 적장자가 아닌 정통성이 없던 왕이었다. 이런 세종대왕의 어린시절은 실로 고난과 시련들로 가득했다.
세종대왕 탄생
세종 이도는 1397년 이방원의 삼남으로 출생한다. 세종은 조선에서 태어난 첫번째 왕이다. 세종은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왕! 꽃길만 걸었을 것 같지만 태어나고 4년동안 조선의 왕위가 할아버지 태조-> 큰아버지 정종- 아버지 태종으로 바뀌는 격동의 시기를 겪었고 무었보다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야했다.
세종대왕 탄생일 (스승의 날)
1397년 세종대왕 탄생일은 5월 15일(양력으로 환산한 날) 스승의 날로 기념일로 정하였다. 태어난 곳은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했고 서촌 현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가면 세종대왕 탄생한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때 세종의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세종대왕의 가족이 흩어져 살았던 이유 (6~8세)
당시 정도전이 강력한 권력을 쥐고 사병혁파의 주요 타킷이 세종대왕의 아버지 이방원이였기 때문에 가족들이 화를 당할 것을 염려해 장남 양녕은 외가로 효령대군은 측근 홍영리의 집, 세종은 너무 어려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당시 이성계와 이방원은 심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때 세종은 6세였다. 1402년 세종이 8세가 되던해 큰형 양녕은 세자로 책봉된다.
세종대왕 9세
1405년 창덕궁 건설 기념 연회에서 벌어진 사건이 있다. 태종은 당시 신하들에게 9살 세종 쓴 글씨를 보여주었는데 무관이었던 신극례가 그 글씨를 찢어버린 것이다. 태종의 처남 원경왕후의 동생, 세종의 외삼촌 민무구가 신극례에게 주고서 눈짓하며 술취한 척하며 찟게 한 것이다.
당시에는 큰 문제없이 지나갔던 사건이다. 그러나 1407년 이 사건이 재소환된다. 민무구는 태종에게 세자 이외에는 왕자 가운데 똑똑한 자가 있는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동생들은 똑똑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내용이 세종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심리적 불안은 심했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세종대왕 12세
양녕대군의 외숙 민무구는 이 사건으로 어린 왕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죄명으로 자결을 명받게 된다.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는 친정 오라비들의 연이은 숙청으로 부부사이는 악화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가 극심하던 그때 12살 세종은 아내를 맞이한다. 세종은 이렇게 태어나서 12살까지 격동기를 거쳤다.
그래서 세종은 무예가 아닌 책을 읽으며 불안감이나 긴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서가 일종의 도피처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
세종 22살
그리고 혼인을 하고 세종은 16살에 첫째 아이를 낳고 21살때까지 2남 2녀를 낳는다. 22살때 세종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세자 양녕이 기행을 일삼게 되면서 양녕을 폐세자시키고 세종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것은 세자로 책봉 되고 2달 만에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세종 즉위 당시 상왕으로 태종이 살아있었고 세종대왕의 형 정종도 상왕으로 있었다. 다시 말해 세종 즉위 당시 왕이 3명이 있었다.
그래서 세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여전히 실질적 권력을 태종이 쥐고 있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한 해 장인 심온이 숙청된다. 태종과 세종 사이를 이간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심온이 사사된 후 나머지 가족은 노비로 전락된다. 그러나 세종은 이 사건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심온이 죽은 다음 날, 태종이 연 연회에 참석한다. 이것은 역적의 딸이 된 소헌왕후를 지키기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세종의 시대
태종 승하 이후 본격적인 세종의 시대가 열린다.
세종의 리더십
세종은 태종의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심온 숙청 당시 관비로 전락했던 소헌왕후의 어머니를 바로 복원시켜준다. 이에 소헌왕후의 가족 숙청에 가담했던 이들은 정치적 보복이 가해질 것을 두려워 하며 떨고 있었으나 세종은 능력이 되는 인물은 과오를 품고 등용했다.
황희 등용
또한 세종은 자신의 왕세자 책봉을 누구보다 반대하고 이 일로 유배까지 간 인물 황희를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이도'라는 개인이 아닌 조선의 왕으로서 내린 선택이었다. 즉위 동안 600회 이상의 경연을 실시했던 세종이었다.
세종 말년에 각종 질병에 시달렸던 세종은 거동도 힘들어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그 상황에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세종 ! 단종 죽음에 책임이 있다?
문종 이야기 (세종대왕 맏아들, 조선 최초의 적장자 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