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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꼬꼬무

소말리아 내전 속 모가디슈 강신성 대사 탈출기 [꼬꼬무 4회]

by 짱신나^^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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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만 이천 킬로 떨어진 '아프리카의 뿔' 이라 불리는 곳에 소말리아가 있다. 소말리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건은 아덴만 여명작전(2011.01.21)으로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된 삼호 주얼리호를 대한민국 해군 '청해부대' 가 구출한 일이 있고 최근 영화로도 나온 '모가디슈'는 소말리아 수도로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때 우리나라 대사가 탈출하는 이야기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오늘 꼬꼬무에서 다루는 내용이기도 하다.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나라


소말리아 내전 배경


소말리아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식민지였고 1960년 7월1일에 소말리아 공화국으로 독립을 했다. 초대 대통령은 오스만 전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군부 세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대통령이 시아드 바레로 21년간 독재를 했던 인물이다. 집권 초기에는 산업화와 경제 개발에 힘쓰지만 지역주의 정책으로 자기 지역 사람들만 등용하는 등 독재를 시작하면 불만이 많아지자 독재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대 소말리아 주의를 선포, 소말리아 사람이 사는 곳은 모두 소말리아 영토이다.라고 하니 에티오피아와 분쟁이 벌어졌고 이때 소말리아인이 대다수인 케나의 지역 오가덴을 침공 '오가덴 전쟁'이 발발(1977~78)하는데 이 전쟁에서 소말리아는 참패를 한다. 

이에 다른 부족들과 정치 집단들은 통일소말리아의회(USC)를 결성하여 1991년 바레 정권에 대항하는 소말리아의 반군 지도자 아이디드 장군과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고 내전의 중심은 대통령궁이 위치한 모가디슈였다. 

 

 

소말리아 내전 당시 상황 

모가디슈에는 소말리야 주재 24개국의 대사관들도 모여있는 지역이다. 그중에 가장 먼저 탈출한 나라는 중국 대사, 내전이 격화되기 며칠 전에 발 빠르게 탈출, 미국도 대규모 자국민 구출작전을 시행 탈출시켰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1991년은 냉전 시대로 이때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적대국이었다. 그러나 소련 대사가 자국의 대사관저를 버리고 미국 대사관저로 피신을 했고 미군이 보낸 헬기를 타고 소련 대사도 대피를 했을 정도이다.   


당시 한국 대사관 상황

소말리아에 있는 우리 대사관도 상황은 똑같았다. 무정부 상태에 있던 소말리아는 외국 대사관을 지켜줄 병력이 없었고 모가디슈는 하루아침에 지옥이 되어있던 상태로 이 와중에 무장 강도들까지 총을 들고 관공서, 은행, 상점 등을 약탈했다.  외국인들의 경우 주로 차량을 탈취당했고 이때는 대사관 외국인 개념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탈취하고 반항하면 총을 좌 죽이는 무법천지의 지옥이었던 것이다. 

소말리아 한국 대사관 직원으로 있는 남편을 반 년만에 만나러 간 김두남 씨는 오랜만에 만난 부부는 며칠간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도 잠깐 밖에서 대포소리, 기관 총소리가 나면서 거리에는 시체들이 즐비한 것을 목격한다. 그러니 교민들은 여기 있을 수 없었고 한국 교민들 7명은 짐을 싸서 한 곳에 모였다. 그곳은 1987년부터 소말리아 초대 대사로 3년간 근무했던 강신성 대사의 집이었다. 

 

처음이지 마지막 소말리아 대사

 

강신성 대사는 이때 평소 친분이 있던 소말리아 장군을 찾아가 사설 경비원 4~6명을 300달러에 얻게되었고 그 당시 이례적으로 대사관에 무장 경비가 있어 그래도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나 무장 경비와 무장강도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강도들은 도망갔지만 대사 관저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소말리아를 탈출할 결심을 한다. 그러나 한국과의 통신 수단이 모두 끊긴 상태였다. 
 
놓쳐 버린 구조기
이들은 공항 관제탑에 교신을 보내서 우리나라에 구조기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공항 측에서는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고 구조기를 보내온다는 연락이 와서 우리 교민과 대사는 공항으로 향했다. 멀리서 비행기 오는 것이 보였고 기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 대합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문이 열리지 않았고 몇 번을 두드리고 힘을 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비행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강대사는 공항 직원에게 강력하게 따졌으나 공항 직원이 하는 말은 그들이 봤던 비행기는 이탈리아 비행기로 이탈리아 교민을 태우고 떠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행기가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는 교신에 착오가 생겨 일어난 일이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 미라클 작전으로 300명이상을 구출했던 우리나라지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로 비행기를 보낼 형편이 되지 못했다. 

 

 

북한 대사관 일행 만나다.

 

이때 뭔가 아주 익숙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북한 대사관 일행이었다. 이 당시 남북한의 관계는 최악이었던 시기로 남/북 모두 UN가입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한이 UN에 가입하려고 하면 공산권 국가들이 반대했고 북한의 주장은 통일 후에 단일 국가로 가입을 원했다. 그래서 남북 동시 가입을 제안했으나 북한이 거절하면서 남한만의 가입을 위한 투표권이 있는 나라를 포섭해야 하는 불꽃 튀는 외교전쟁이 한참이던 때로 남북한은 서로 원수 같은 사이였다.

이런 시대와 상황 속에서 북한 사람을 공항에서 마주쳤다. 처음에 서로를 경계했고 어색했다. 그러나 북한 측에서도 구조기를 보내는데 실패를 했던 상황이었고 이들의 몰골을 보니 거지꼴, 도망자 몰골이었다. 이들은 무장 강도들에게 8번이나 털려서 더 이상 위험한 상황에 아이들을 노출시킬 수 없어서 무작정 공항으로 왔다고 한다. 

강대사는 고민에 빠졌다. 데리고 가기엔 인원이 너무 많고 안 데려 가려니 아이들이 걸렸다. 그리고 생각 후에 그들을 데려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북측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1시간 30분의 고민할 시간을 가진 후 북측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위해 남측이 보낸 자동차를 타고 한국 대사관으로 온다. (이들도 아이들이 없었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이탈리아 대사관에 도움 요청

 

그리고 함께 모인 남북은 탈출 계획을 짠다. 소말리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소말리아에 대한 영향력이 크고 비행기를 구할 수 있는 여력이 있던 유일한 나라였다. 어떻게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는 대통령 궁이 있었다. 반군과 정부군의 격전지를 지나가야 되는 상황이었고 가다가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강 대사는 자신이 가겠다고 말한다.

다음날 강대사는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했고 거리는 끔찍했다. 곳곳에 시체가 널려 있고 더 끔찍한 것은 손에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큰 총을 들고 어깨엔 탄띠까지 두른 소년병들이 있었다. 

 

소년병들이 많은 이유는 인건비가 적게 들고 높은 충성심 때문이다. 또한 가장 큰 이유는 충 가치가 월등하기 때문이다. 전투의지가 상실되도록 아이들을 발가벗겨 전투에 앞장세우기까지 한다.
한 보고 서에 따르면 지금 현재도 30~50만의 소년병이 87개국에 걸쳐 전투에 참여하고 있고 그 중에 1/3은 소녀병이라고 한다.

 

남북 대사들이 탈출을 위해 했던 일

다행히 강대사는 이탈리아 대사관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남측 일행 8명만 탈출을 돕겠다는 이탈리아 대사를 눈물로 간곡히 설득해서 북한 사람들 모두와 함께 탈출할 수 있는 적십자 비행기와 군용 비행기를 얻게 되었고 나갈 수 있게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시각 북한 측 강용수 대사도 당시 북한과 친하게 지내던 우방국인 이집트 대사관을 방문해서 이집트 대사에게 이집트에 있는 북한 대사관과 한국 대사관 두 곳에 연락을 요청했다고 한다.  최선을 다해 각자의 방법으로 노력한 두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대사관 이동 계획 

모두가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가기 가장 안전한 시간은 예배 시간으로 소말리아인 99%가 이슬람교로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올린다. 예배시간이 울리는 아잔(10분 동안)에 맞춰 차량 4대로 나눠 이동하기로 했다. 차량 4대 중 3대는 일반 승용차였고 1대는 승합차로 반군의 주요 타깃이었다.  반군이나 무장 강도들이 이 승합차를 탈취 개조해서 전투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탈취할 때 운전석을 조준 사격하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이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하고 중요했다. 승합차의 운전을 남측 박용원씨가 맡기로 했다.  

 

승합차를 탈취 전투용으로 개조하는 일이 비일비재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찰나 북한 측에 있던 북한 무전수가 자신의 가족은 자신이 지키겠다며 운전을 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운전수가 바뀐다.  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차량 4대는 큰 대로를 행진하고 있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길가에 총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필사의 탈출

그리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대통령궁이 보이고 바로 그때 전방위에서 총알이 날라 오기 시작한다. 총알을 피해 필사적으로 악셀을 밟고 도망가는데 세 번째 차량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차가 뒤뚱뒤뚱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선두의 차량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어 골목길을 지나 마침내 대사관에 도착한다. 그 순간 뒤쪽의 승합차가 앞차와 충돌한다. 급하게 뛰어나와 차량으로 뛰어갔고 승합차의 운전수는 숨을 쉴 때마다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총을 맞았던 것이다. 북한 무전수는 총을 맞은 상태에서 가족들을 위해 고통 속에서 계속해서 운전을 했던 것이다. 

 

대사관 문이 열리지 않는다
북한 운전수가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사관에 빨리 들어가야 했으나 대사관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때 강신성 대사는 품에 갖고 있던 태극기를 빼내 흔들기 시작한다. 펄쩍펄쩍 뛰면서 간절하게 흔들고 있던 순간 뒤에서 북측 외교관이 태극기를 뺏어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외쳤다. '한국 외교관이 왔다. 제발 문을 열어 주세요' 를 외쳤다. 남북이 살기 위해 절박하게 외쳤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생사의 경계에서 이념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남북 두 외교관은 30년대 태어난 분단 전 세대이다. 분단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단 후 세대와 달리 이들은 마음 한편은 하나였다는 동질감이 강했다. 48년도 남북이 갈라지기 전까지 북한에도 명절날 학교 앞에 태극기를 걸고 행사를 했었고 김일성이 함께한 행사에도 등장했던 태극기다. 이로 인해 태극기에 대한 반감이 적었던 30년대 생들이다. 

 

 


무전수의 희생
의료진이 달려와 북한 운전수의 상태를 확인했으나 가망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북한 무전수를 이탈리아 대사관 화단에 묻고 부인에게는 치료를 위해 이송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의 영혼이라도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무전수의 머리는 한반도를 향해 놓았다고 한다.

 

필사의 비행기 탑승

사흘째 되는 날 비행기가 온다는 소식과 함께 정부군과 반군이 휴전 2시간을 갖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기회를 이용해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했고 폐허가 된 도시를 지나서 모가디슈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보이고 그들은 비행기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그 순간 갑자기 땅이 울리기 시작하고 천둥소리가 난다. 

 

갑자기 수 백명의 소말리아 사람들이 떼거리로 필사적으로 뛰어나와 구조기를 타려고 달리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사람들이 넘어지고 소말리아 모가디슈 공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비행기 착륙부터 이륙까지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 한 명의 낙오 없이 모두 탑승에 성공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탈출 시 160명 정원 수송기에 640명이 탑승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소말리아 탈출 성공

이들은 이렇게 소말리아 탈출에 성공한다. 비행기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소말리아 이웃나라 케냐 뭄바사 공항에 도착했고 거기서 북한 사람들과 회포도 풀지 못하고 헤어진다. 북한 사람들에게는 남측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아쉽지만 그곳에서 이별을 했던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두 사람은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그날 이후 30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북한 사람들의 소식을 듣게 된다. 

 

 

소말리아 탈출 후 북한 사람들의 행방

다행히 이들은 북한에 무사히 들어갔고 북한으로 들어간 김용수 대사는 완전히 이 일의 책임을 피할 수 없으니 퇴직을 하게 되지만 밑에 있던 직원들은 외무성에 다시 출근하면서 평범하게 일상으로 돌아가서 대부분 승진한다. 또한 사망한 무전수의 아내는 남편이 해외 나가서 죽으면 순직 처리가 되어 대외 통신 관리국 문서원으로 사망 전 남편이 일했던 곳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이다.  

강신성 대사는 올해 85 세지만 날이 갈수록 그날의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남북 통일이 되면 그들을 찾아서 회포를 풀고 싶다고 한다.

 

[출처 이만갑, 꼬꼬무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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