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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세종의 업적 및 집현전이 수정전이 된 이유는?

by 짱신나^^ 2020.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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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3회]

 

오늘의 탐사지: 경복궁, 고궁박물관 

주제: 세종대왕 업적 및 집현전 이야기
출연자: 설민석 

 

 

 

 

세종대왕의 이름은 '이호' 로 그 당시 왕의 이름에 쓰인 한자는 백성들이 사용할수 없기 때문에 왕의 이름엔 어려운 한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묘호란? 

 

 

죽은 이의 영혼이 위패(신주) 안에 깃든다고 생각하고 그 위패를 모셔둔 단지(=상자)를 신주단지라고 하고 신주를 놓던 그 자리가 신위, 그 신위에 붙이는 이름이 묘호로 그것이 바로 '세종' 이었다.
 
시호란?
 
시호는 그 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이름으로

 

세종의 시호는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

 

영문:문에 뛰우나시고
예무: 무예도 뛰어나시고
인성: 성품이 인자하시고
명효: 명석한 두뇌와 효도, 효성스럽다.
 
 
 
세종의 어린시절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이들 충녕대군이다. 첫째는 양녕대군으로 양녕대군 또한 똑똑했으나 하필 동생이 충녕대군(세종)이 다방면으로 천재성을 보인 충녕을 보고 넘을 수 없다는 걸 느꼈던 걸까?
 
첫째 양녕대군은 충녕에 대해 ' 충녕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라고 여동생에게 가서 충녕의 비범함과 양녕의 심정을 담은 기록도 있다. 양녕대군이 방탕해진 이유가 충녕대군(=세종)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날 태종이 하는 말을 들은 후

 

우연히 아버지 태종의 속마음을 알게 된 양녕이 일부러 방탕하게 굴었다는 야사도 있다. 양녕대군은 그후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선을 넘어 양녕대군이 사랑한 기생 어리를 간통하고 납치한 얘기를 세종이 고자질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국 초기 나라를 걱정하고 양녕의 방탕한 생활을 염려하여 이실직고 한 기록이 아닐까..
 
양녕이 충녕보다 학문이 깊지 못한 것을 꾸짓으며 결국 세자를 폐위하고 첫째가 아닌 셋째 충녕을 세자로 삼겠다는 결정을 내렸던 태종이다.
 

 

 
세종 즉위식
 

 

즉위식은 선왕이 승하한 후 일주일 뒤에 즉위식이 거행된다. 빈전을 지키던 세자는 상복을 입고 있다가 면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처러야만 했다. 그 이유는 왕위를 공석으로 둘수 없기 때문에 선왕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근정전 앞에서 즉위식을 치려야 했는다. 그러나 조선 왕의 즉위식은 시작부터( =태조 이성계) 순탄치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아들 정종에게 왕위 넘겼는데 이것을 양위= 선위라고 부른다. 그 후에 정종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동생 태종 이방원에게 선위를 하고 태종 이방원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충녕 세종에게 선위를 한다. 그래서 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선왕 정종과 태종 둘 다 살아 계신 상태로 즉위식을 하게 된다.
 
원래 선왕이 승하하시고 즉위식을 하면 애도의 마음을 담아 근정문에서 부터 거행한다. 그러나 선왕이 살아계신 상태에서 하다보니 세종은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했다.
 
 
 
경복궁을 되살린 왕
세종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있던 창덕궁에 계시다가 왕이 된 후 경복궁으로 거처 옮긴다. 가장 경복궁을 잘 활용한 왕이 세종이었다.
 
경복궁을 되살리고자 집현전을 통해 경복궁 출입문의 이름을 짓고 정무처와 거처들도 새롭게 건립하고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는 동궁인 자선당을 만들고

 

경회루 연회를 베풀던 장소와
 
경회루(국보 제224호)

 

 
연회와 강연의 장으로 사용되었던 경회루는 옛날에는 담이 있어 왕과 일부 신하만 갈 수 있던 장소였고 안을 볼수가 없었다. 한 일화로 직급 낮은 관리가 담을 넘어 구경하다가 세종을 만났는데 세종은 노래 한 곡 해보라고 했다. 그만큼 은밀하고 풍류가 있는 곳이었다.
 

 

 
사정전인 왕의 집무실을 재건했으며
 
국립과학기술원 같은 천문대와 과학기술 집합체인 흠경각을 보수 건립 한다.

 

경복궁에 화재가 빈번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 관청인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소방 메뉴얼과 방화 대책을 마련한다.
 
드므 설치

 

 
방화수 담아놓은 그릇으로 초기 진압용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
 
화마가 드므에 비친 흉직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 도망

 

 

 

 

 
집현전 이야기
근정전 서쪽: 수정전.

 

원래 수정전 건물이 집현전 자리이다. 고려시대 때도 집현전이 있었는데 집현전(모을 집, 어질 현) 현명한 사람들을 모았다하여 집현전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유명무실했다. 이곳을 세종이 활성화를 시킨다.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이런 사람들이 일했던 곳으로 1940년부터 37년간 96명의 학자배출를 배출했다.

 

 

조선은 3년에 한 번 33명만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았는데 집현전 학자 96명 중 16명이 과거 1등 수석 출신이고 2등이 6명, 3등이 11명 있는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다.
 
 
집현전이 수정전이 된 이유
(집현전 -홍문관-수정전)
 
단종 이후 세조 때 사육신들이 대부분 여기 집현전 출신이었기 때문에 열받은 세조는 1456년 재위 2년 때 결국 집현전을 폐지했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 9년에 그 정신을 이은 홍문관으로 이름 변경되며 실질적인 기능을 다시 시작한다. 그 후 한참 후에 1867년 고종 4년에 수정전이 된것이다.
 
집현전의 비밀
 
집현전 학자들의 업무량은 중노동을 넘어 어마어마했다. 왕의 침전인 강년전이 아주 가까이 있었고 이직이 안됐다.

 

 
신숙주가 집현전에서 공부하다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왕의 옷이 어깨에 덮어져 있었다.

 

이것이 미담같지만 신숙주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감이었을 것이다.

 
사가독서제란?
 
집현전은 최소10년 최대 20년동안 일을 했던 곳이다. 세종은 연구에 지친 학자들에게 사가독서제(안식년)를 만드셨는데 일종의 자택근무 하도록 안식년처럼 주셨다가 독서실을 따로 만들어 주신다며 진관사 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격려 차원에서 계속 집현전 학자를 그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사직을 청하면 바로 거절을 했는데 윤회라는 신하가 모친상을 당했는데 원래 3년 상을 치러야 하는데 주요 공무원들은 백일상만 하는 것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임금과 신하가 같이 토론하고 공부라던 자리인 경연을 자주 하기로 유명한 세종은 태종은 18년 재위 기간 동안 60번 정도 했던 경연을 세종 대왕께서는 무려 1,900여회로 연간 60회를 한 셈이다.
 
경연: 왕이 공부하는 자리이자 정책 세미나였던 모임
 
 
 
 
세종의 업적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 '농사직절'
 
중국은 농상집요 중국책을 쓰고 있었는데 왜 조선만의 농서가 없을까 해서 경험이 많은 늙은 농부에게 물어서 전국을 발품 팔아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최초의 농서인 농사직설을 세종 11년에 만들었다.

 

세종은 검증을 위해 궁에다가 논밭을 만들어 직접 농사를 지으셨다. 쌀 한 섬을 직접 수확까지 했다.
 
우리 산천에서 나는 약재를 집대성해서 '향약집성방'

 

백성을 위한 복지정책
 
세종대왕은 노비까지도 포용했다. 배가 부른 임신한 관노비를 보고 아이 낳고 얼마나 쉬는지 물었더니 일주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그럼에도 산모와 태아를 배려하여 출산 전 휴가 30일까지 총 130일을 준다. 지금 법적 출산휴가 90일 보다 더 길었고 노비 남편에게도 30일 휴가를 주어 총 160일 의 출산휴가가 노비에게 주어졌다.
 
장애가진 백성은 점술사나 악공으로 쓰고 그때 신하와 나눈 말이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
 
그 당시 고아들이 많았다. 흉년이 들면 그로 인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가 급증 했었다. 이에 세종은 극대노하고 고아를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전부 구휼하도록 명령한다. 부모를 찾아주고 부모를 못 찾으면 관에서 보육하도록 하도록 했다.
 
 
세종의 공법 실시
 
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진 조세제도는 공무원에게 세금징수권를 주는것으로 주관적으로 기입하다보니 백성에게 불만이 생겼다. 그래서 세종은 조세개혁을 계획해 농사 형편에 따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전분6등) 농사의 풍년,훙년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는 '연분구등법'을 만들었다. 백성 모두를 위해 심사숙고하여 생산량과 기후들을 고려해 공평하고 합리적인 세법을 제시했고 이를 '공법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를 바로 시행하지 않고 백성에게 물어보고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17 만명에게 일일히 조사하여 찬반을 가려 57.1% 로 찬성을 받았으나

 

만만치 않은 반대표를 보고 바로 시행하지 않고 또 다시 임시로 제한된 지역에서 시험해보라고 한다.
 
★세종의 4군6진 설치
 
세종은 책 읽기만 좋아하고 군에는 관심이 없었고 물론 말타기, 활쏘기에도 관심이 없었다. 세종 초기 병권을 잡고 있던 아버지 태종은 황해도 충청도 쪽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회의를 소집해 대마도정벌에 성공한다. 이는 세종에게 군사적 소양을 기르는 큰 계기가 되었고
 
세종은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는 여진족 몰아내고 압록강 상류에 4군을 설치하고

 

두만강 하류에는 6진 설치했다.

 

이렇게 세종의 4군 6진은 현재 우리 국토의 모양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궁박물관 속
열린수장고

 

 

 
세종의 태항아리
 
세종의 탯줄을 보관한 태항아리로 1601년 임란 이후 보수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모습
 
탯줄의 보관은 모든 왕들 다 보관했는데 절차도 엄숙했다.
 
백 번을 씻고

 

비단에 쌓아서 넣고

 

묻고 태실을 만들어 엄숙히 보관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탯줄이 아기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들의 탯줄을 소중히 다루었다고 한다.

 

 

태항아리에 많은 손잡이들은 밀봉을 위해 줄로 꽁꽁 묶어 완전 진공상태로 하기 위함이었다.
 

 


옥새의 종류 중 하나인
어보
 
문종이 세종 승하 후에 주려고 만든 어보이다.
업적을 기리는 시호,존호,휘호 등이 새겨진 의례용 도장이다.

 


 

바닥에 적힌 세종의 어보에는 시호인 영문 예무 인성 명효가 써있다. 아버지을 향한 존경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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