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3,24회]
오늘의 탐사지: 경복궁, 고궁박물관
주제: 장영실 발명품들
출연자: 설민석
흠경각
경복궁 내 흠경각은 일종의 오늘날의 천문과학연구소였다. 15세기 서양에서도 막 르네상스로 과학기술이 태동하던 때로 우리나라의 세종대왕도 뒤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과학기술를 발전시켰다.
흠경의 뜻은 '흠약호천 경수인시'라고 해서
당시 조선은 시간만큼 중요했던 것 농경사회였기에 절기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절기를 국가에서 파악하기 위한 기관이 흠경각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덕연구단지, KIST를 모아놓은 종합과학연구원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과학기술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당시 서양의 중세 시대는 과학분야에서는 발전하지 못한 시기였고 중세 시대가 끝나고 르네상시시대에 본격적으로 과학이 발전했다.
서양보다 빠른 조선의 과학기술이었다.
조선시대
천문학의 중요성
세종 즉위 3년 1421년부터 천문과 역법에 집중을 했다.
당시 천문을 아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것과 다름없었다. 왕= 하늘, 하늘에 위임 받은 자로 하늘의 움직임을 읽는 것이 왕의 힘을 증명하는 것다.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예측하는 역법으로 이순지의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시간 체계를 확립한 세종이었다.
조선은 일식을 대비해야 했다!
해는 임금을 뜻하고 하늘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에서는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을 대비하는 게 중요했다.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은 국가적 비상 사태로 이것을 막기위해 혼천의를 이용해 계산으로 달이 해를 가리더라도 국가가 통제하고 있고 백성들은 놀라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세종대왕 전에는 일식을 예측하려 했는데, 임금이 하늘에 절을 할 정도로 일식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었다. 임금이 기다렸는데 일식이 안 일어나면 사람들은 계산이 틀렸거나 하늘에 무슨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종은 달랐다. 중국의 역법을 썼기 때문에 조선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문과 역법에 집중하여 혼천의, 칠정산으로 기존보다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천문 프로젝트의 수장
이순지
문과 급제자 이순지는 세종에게 발탁되어 천문 프로젝트의 수장이 되지만 과중한 노동량에 모친상을 당해서 김담이란 자를 추천하고 김담 역시 똑똑했지만 스무 살의 나이로 너무 어려서 김담과 이순지가 같이 야근해서 칠정산이라는 달력을 제작하게 된다.
이순지는 세종때부터 세조까지 무한 신임을 받던 인물이다. 세종때 관직을 청탁한 것으로 인해 파직 됐었지만 세종은 2년뒤 다시 복직시킨다.
이순지가 만든칠정산
당시 조선은 중국의 천문학을 빌려 연구했는데 세종 때 만들어진 칠정산은 하나의 이론이다. 몇 시간 동안 별을 보면 별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는데 하늘은 고정되어 있고 지구가 도니까 별이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인다. 하늘의 수 많은 별중에 딱 7개만 다르게 움직인다.
(월화수목금토일) 요일이 7개의 별로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일:태양을 의미한다. 이 7개 별만 다른 별과 다르기 움직인다.
이 7개의 별을 예측하고 위치를 측정해 시간을 정하는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이 7개의 별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역법)이 칠정산이다. 이 칠정이 중요하므로 요일 이름을 따온 것이다.
칠정산 내용
칠정산은 내편과 외편이 있는데
내편: 원나라 역법을 한양의 위치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고
외편: 가장 정확했던 이슬람의 회회력이 있지만 너무 어려워서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이순지가 연구하고 이를 해석하여 조선 천문학을 새로 쓴 것이 <칠정산 외편>으로 더욱 정확해진 천문 계산이었다.
당시 역법은 (하늘=왕 ) 굉장히 중요한 국가 기밀이었다. 그것을 문서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계산인데 이순지가 이를 해내고 이슬람의 회회력은 고대그리스 천동설에서 온 것으로
이 계산법을 이해하여 지구의 공전주기를 계산한 것이 현대의 계산과 단지 1초만 차이가 날 정도로 정확했다. 그것이 칠정산 외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지구 모양
당시 지구는 물 위에 떠 있고 하늘은 둥근 뚜껑 모양으로 덮여있다고 생각했다.
혼천의
혼천의는 1433년 발명한 것으로 하늘 모양의 둥근 기구를 통해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이다. 이를 조금 축소시킨 것이 간의 (1432) 라는 기구가 있다.
만원권에 있다.
혼천의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구이다. 혼천의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사유의 : 안쪽에 막대기가 있는 원, 동서남북 방향을 관측
삼진의: 중요한 세개의 띠, 해와 달, 별을 관측
육합의: 기본 골격으로 방향과 수평을 담당
칠정산 역법에서 7개 별의 움직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그 중 2개는 움직임이 비교적 단순하고 5개는 움직임이 복잡하게 움직인다.
2개는 해와 달이고
삼진의 나머지 5개는 혼천의로 매일 움직임을 기록 후 기록한 별들의 움직임을 계산하여 이순진이 칠정산을 만든 것이다.
장영실
장영실은 부산 동래 출신이고 아버지가 중국 귀화인(원나라) 에 엄마가 기생이었다. 관노 출신 장영실을 태종 때 등용되어 당시 충녕대군이 눈여겨 보다가 세종이 등용하여 혼천의, 자격루등 다양한 세종의 업적을 현실화 시킨 세종의 손인 장영실이었다.
장영실 발명품들
1432년 간의 (천문관측기구)
1433년 혼천의 (천문관측기구)
1434년 자격루 (물시계) , 앙부일구 (해시계), 갑인자 (동활자)1437년 현주·천평·정남일구 (해시계), 규표 (해그림자 측정기), 일성정시의 (낮, 밤 시간측정기) 1438년 옥루 (천상 자동물시계) 1441년 수표 (하천수위 측량기구) 1442년 측우기 (강우량 측정기)
측우기
강우량을 측정하는 장치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독보적인 과학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빗물을 직접 담아보자고 처음 생각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빗물을 담는 통 또한 통의 크기에 따라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정하기가 어려웠다.
현시대의 우량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당시의 측우기는 무수히 실험해보며 시행착오 끝에 나온 크기였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강우량을 파악해서 기록한 것은 조선이 최초로 유럽보다 약 200년이나 앞서 강우량을 관측했다.
단순해보이만 그 어떤 것보다 과학적인 유산이고 세종의 업적이지만 세자 시절 문종의 아이디어로 나온 측우기이다.
장영실의 죽음에 관한 세 가지 설
세종이 아끼는 장영실은 세종의 전폭적인 지지로 대표적 발명품으로 혼천의, 앙부일구, 청계천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 설치, 측우기 등을 발명했으나 마지막 장영실의 죽음은 명확하지가 않다. 장영실의 죽음에는 세가지 설이있다.
1. 장영실을 명나라부터 보호하기 위해 숨겼다.
2. 천문 프로젝트 끝나고 훈민정음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되서 쓸모없어져 토사구팽 설.
3. 장영실을 향한 시기와 질투로 조순생이란 자가 장영실이 가마가 튼튼하지 않다고 말했음에도 이를 묵살하고 부셔지자 장영실을 모함 제거설.
설쌤 판단으로는 1번. 성군 세종대왕이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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