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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상하이 근대화 역사 (81-2)

by 365 ^^ 2023. 1. 13.

이전내용 : 벌거벗은 세계사 81회  상하이 근대화 역사 / 조계지 형성 과정

상하이의 발전 

영국은 상하이 조계를 치밀하게 장악하는 한편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선진화된 시스템도 함께 도입하였다. 가스 회사를 설립에 가스를 공급하기도 하고 수자원공사를 설립해 깨끗한 수돗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1880년대에는 전기 공급으로 인한 전화가 통용되면서 상하이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근대화된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불과 30년 만에 급격하게 변화한 상하이였다.  조계라는 불평등 조약이 만든 근대화는 역사의 어디서나 볼수있는 아이러니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상하이 조계지가 입소문이 퍼지면서 독일, 포르투갈 등 더 많은 나라가 유입된다. 특히 일본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급증했던 이유는 1894년 청일전쟁 즉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약 9300명이었던 외국인 인구가 10년만에 약 16,000명이 늘어나게 된다.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시사만평 / 곰 -러시아, 영국-불독, 독수리-미국, 개구리-프랑스



회중호텔 (중국 최초 엘리베이터)

열강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지만 내부 자체는 외형적으로 엄청나게 발전하게 된다.  많은 인구와 토지가격 상승으로 부동산 붐이 일어나게 되고 부동산 붐으로 땅값이 올라가게 되면서 대부분의 건물을 재건축하게 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건물이 회중 호텔이다.  

회중호텔


재건축된 회중 호텔에는 중국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생기면서 상하이의 랜드마크로 알려지게 된다. 1908년 중국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이 회중호텔이다.  

당시 설치된 엘리베이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엘리베이터 내부


 

와이탄은 중국인, 외국인의 거주와 함께 중국자본이 만든 최초의 은행인 통상은행이 자리를 잡았고 유럽 최대의 금융기업 구 HSBC 빌딩도 세워지게 된다.  그러면서 금융, 상업의 도시로 발전하게 된 와이탄이다. 현재 상하이는 아시아 최고의 경제 도시로 성장했다.  열강에 의한 발전이 좋은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열강의 경제 침탈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게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청나라였고 이에 서구 열강들은 은행을 세워 청나라에 고리로 빌려주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들은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염전 개발권, 무역에 관세 제외등을 활용해 경제적 이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청나라의 경제를 약탈하고 통제한 열강들이었다. 이렇게 서구열강에 반식민지화 되어가고 있었다.  

옛날 중국통상은행, HSBC
오늘날 중국통상은행, 구HSBC


상하이 사회문제 
나라의 부채가 점점 증가하면서 빈곤층도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인들의 삶을 파괴한 매춘산업도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그리고 중국인들을 삶을 파괴했던 심각한 또다른 사회문제는 아편이었다.  개항장 상하이에서는 어느 곳에 에서나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1900년대 상하이 내에 최대 1700여 개의 아편굴이 존재했다.  화려한 도시 뒤편에는 아편 중독자로 전락해간 중국인들이었고 중독자 대부분은 인력거꾼, 수레꾼, 공장 노동자 등 조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던 도시 하층민과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무리 일을 많이해도 빈민가를 벗어날수 없었다. 이들은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아편굴을 찾으며 현실을 도피하려 했다.  서양인과 중국인의 차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서양 경찰은 봉급으로 70냥을 받으면 중국인은 8냥 정도 9배정도 차이였고 형사 진급연도도 서양경찰은 3~4년, 중국인은 24년정도 걸렸다.   

 

봉급 차이


 
이런 부당한 대우에도 상하이로 인구가 몰려들었던 이유는 당시 청나라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그러나 지주 계급이 농민에게 소작을 주던 봉건 방식을 농민 착취의 수단으로 활용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심각한 착취로 인해 생업을 버리고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던 농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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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 중국 공산당 탄생 역사 (쑨원 - 마오쩌둥 - 덩샤오핑)

중화민국 탄생 전 청나라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그러나 지주 계급이 농민에게 소작을 주던 봉건 방식을 농민 착취의 수단으로 활용을 했던 것이다. 지주의 세금까지 떠맡으면 착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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