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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기독교 대박해 - 콘스탄티누스 기독교 처음 국교로 인정 4

by 365 ^^ 2022. 12. 3.

(이전이야기) 기독교 박해 역사 (69-3)

기독교 대박해

 

튀르키예의 이즈미트는 로마의 주요 도시였던 니코메디아였는데 이곳에서 로마제국 역사상 기독교인에 대한 가장 큰 박해가 있었다. 이 시기 기독교 박해의 명칭을 대박해라 불렀다.  

 


이 대박해를 이끈 인물은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년 재위) 로 그가 황제에 즉위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234~284년 약 50년의 시간 동안 26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이 시기를 군인황제 시기라 부르고 26명의 황제 중 자연사는 단 1명뿐일 정도로 암살, 쿠데타가 비번하게 발생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이다. 황제는 권력을 나눠서 로마를 4분할해 4분할 체제를 시작했다. 군사적 자율권을 부여했으나 서로 협의를 통해 제국을 운영하도록 했다.  

 

4분할 체제의 로마


 
기독교인을 박해한 이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집권 초기엔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다. 기독교 신자들을 주요, 궁중 관직에 등용했으나 332년 황제는 기독교인을 박해하기로 결정을 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전쟁 상태였던 로마제국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기독교신자였던 군인들은 살인을 할수 없다는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로마의 군사력이 약화되면서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제대로 막지 못한 로마제국이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의 대박해가 이루어진다. 

 

황제는 교회 내부 장식물, 기구, 성격책 등을 불태우고 전쟁용 무기를 가져와 교회 전체를 파괴했다.  그리고 다음날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황제가 칙령 발표하고 약 1년 후 중병에 걸린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자리에서 물러나 버린다. 그리고 다음 황제가 된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기 시작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게는 100명씩 죽이기도 했으며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동물들의 먹이로 던져줬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폭력과 학살은 축제와 같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꺽이지 않았다. 당시 인구의 10% 정도가 기독교인일 정도로 많았고 박해에 굴하지 않게 되자 황제는 결국 박해를 중단하고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정한 뒤 사망한다. 이런 박해에도 기독교인이 승리를 한 것이다.  

 

 

기독교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인을 인정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인정했던 이유는 당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서방지역을 두고 전투하기 전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문자를 방패에 새겨 나가라는 계시를 받았고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xp- x=ch p=r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문자를 방패에 새기고 나갔고 승리를 했고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승리는 신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때 밀비우스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꿈속 이야기

 

xp -Chr 그리스도를 의미
유럽에서 흔히 볼수 있는 xp 모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3년 전쟁 직후 그는 밀라노 칙령을 내린다. 이 칙령으로 수백년간 이어졌전 기독교 박해는 끝이 났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신자를 인정했던 이유 

당시 기독교는 전인구에 10%가 넘었고 특히 동방 지역 내에만 기독교 신자가 20%가 넘었고 이들을 제국의 협력자로 포섭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는 기독교 교회도 많이 세우고 기독교 성직자 부역을 면제, 취약계층을 돕는 기구도 설치, 성경 보급 전파, 기독교인들만의 주일을 로마의 공식 휴일로 인정함으로써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게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기독교신자가 되는 정식 의례였다. 이후 기독교는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이되었다. 

 

세례를 받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모습


국교로 지정된 기독교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고 국교로 지정했다. 그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할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시기에 기독교 신자는 80%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로마제국 전역의 신전을 파괴하거나 성당이나 집으로 개조해버렸다. 

 

성당으로 개조된 신전

시칠리아 시라쿠사는 외부는 바로크 형식의 성당 모습이지만 내부에는 아직도 신전의 기둥 형태가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신전은 복원된 것이고 판테온 신전은 성당으로 개조되었기 때문에 남아있을수 있었다.  판테온 성당 내부에는 신전 기둥의 일부와 함께 성 요셉과 성자 동상의 조각상들이 함께 있다. 

 

판테온 신전 안 성요셉과 성자 동상 공존

로마 판테온 신전 이야기 (건축가가 뽑은 최고의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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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인구 100만명을 돌파한 도시가 로마였고 그 이후 600백년 동안 없었다. 그 이후 중국의 장안이 인구가 넘어서 이 두나라 사이에 무역을 했던 길이 실크로드이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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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올림픽 폐지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선언 후 393년에 293회 고대 올림픽을 끝으로 이교도 행사라고 해서 금지시켰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 도시 올림피아에서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전 경기로 숭배와 스포츠가 혼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후 근대 1896년 4월 9일 약 1500년 만에 근대 올림픽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390년 이후 기독교에 맞서는 사람들은 혹독하게 처벌을 받았고 모든 서양사람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성장하고 문화도 기독교의 세계관에 따라 자리잡게 된다. 현재까지도 세계사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이후에 기독교는 동방정교, 가톨릭, 개신교로 나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독교 탄생의 역사적 배경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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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12 제자 중 한명이었던 유다는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넘겼고 불신으로 가득 찬 제사장과 군중들 사이에서 핍박과 고난을 겪고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다. 예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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