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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기독교 박해 역사 (69-3)

by 365 ^^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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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내용] 예수의 탄생, 박해 , 죽음 그리고 기독교의 시작 69-2

 

기독교 전파
 예수가 죽은 후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초대 교회들이 등장했고 예수의 제자들이 세계 각지로 선교 활동을 나서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선교활동을 했던 이들이 베드로와 바울이다. 

 

베드로와 바울

 

베드로가 초대 로마 교황이라는 주장
바울은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아시아, 그리스, 로마까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베드로 또한 팔레스타인, 아시아 북부 로마까지 선교활동을 펼쳤다. 베드로는 12명의 제자 중 가장 중심인물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베드로이고 예수는 베드로에게 하늘문을 열쇠를 주었다. 이 말에 근거해 베드로가 초대 로마 교황이라고 주장한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베드로

 

성 베드로의 상징
그래서 바티칸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티칸시티는 열쇠모양이다. 바티칸 앞에 성 베드로 전신상이 있고 오른손에 열쇠를 쥐고 있다. 열쇠자체가 성 베드로의 상징이 되었다. 

 

바티칸 시티는 위에서 보면 열쇠모양
베드로가 쥐고 있는 것도 열쇠

 

기독교 박해

 그로인해 예수의 부활을 믿는 로마 제국내 기독교 신자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65년 경 기독교는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박해한 첫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박해를 지시한 이는 로마제국의 5대황제 네로였다.  네로는 그의 어머니, 스승 세네카, 동생 브리타니쿠스 그 외 수많은 귀족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64년 로마 대화제로 인해 네로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했다.   

 

네로가 기독교인을 타킷으로 삼은 이유
당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종말론이었다. 세상은 멸망하고 하느님이 창조한 새로운 세상이 곧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때 이 화재가 기독교인들은 종말의 징조라고 생각했고 기독교를 믿으라고 말하고 다녔다. 이에 네로는 이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후 네로는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처형하게 된다.   


 


짐승의 가죽을 씌워 개와 싸우게 했고, 신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했다. 심지어 기름을 바른 옷을 입혀 기둥에 묶어 신자들을 횃불로 쓰기도 했다. 이렇게 네로에 의해 기독교인들은 잔인하게 박해를 받았다. 이때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 바울도 로마에서 순교했다. 네로의 기독교 박해는 단시간에 끝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 재판 과정에서 기독교와 유대교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대중들이었다. 공인된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는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로마 제국의 황제는 지속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과 기독교가 충돌했던 이유 

기독교는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 또한 고대 사회부터 있었던 뿌리깊은 차별이 존재했는데 이런 차별을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새로운 공동체라고 주장했다. 로마 제국에는 귀족, 평민,노예 계급이 존재했는데 귀족과 평민은 자유민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노예는 말하는 동물 취급을 받았다. 이런 노예가 전 인구의 30%를 차지했었다.  

   
기독교는 신분 차별에 반대를 했고 심지어 노예를 해방하라는 가르침을 전파 교회 내에서는 모두 동등한 신분이므로 호칭을 형제 자매로 부르라고 가르쳤다. 또 하나 기독교가 강력하게 로마 신분제와 맞섰던것은 바로 남녀 차별이었다. 로마에서 여성이랑 미혼의 경우 아버지에게 기혼의 경우 남편에게 통제권이 있어서 당시 여성은 남성의 통제를 받던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런 로마의 극심한 남펴 차별이 비해 기독교는 평등을 가르침으로써 로마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로마 제국에선 기독교로 개종한 일부 사람들이 결혼을 거부해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기독교는 독신을 이상적인 삶으로 금욕을 장려했기 때문에 일부 젊은이들이 결혼을 거부했던 것이다. 로마에서 결혼은 가부장의 권한이었다. 결혼 거부는 가부장의 권한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미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가부장을 거부하거나 이혼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기독교가 기존 로마의 질서에 반기를 들면서 기독교 박해를 더욱 부추긴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나쁜 편견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보면 예수가 빵을 주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포도주를 주며 이것은 나의 피다. 라고 말했고 최후의 만찬 속 빵과 포도주를 나눠먹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의 성찬식이 유래되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다고 얘기를 했고 기독교를 잘 몰랐던 로마인들에게는 이들이 식인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오해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깊어갔다. 

 

최후의 만찬


당시 로마인들은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고 특히 술을 흥청망정 마셨고 성생활도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 로마의 자유 시민 남자들은 성적인 제재가 없었고 여자 노예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일도 흔했다.  자유로운 성생활이 문화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이 그림은 매춘 광고로 십자가는 교차로를 의미, 왼쪽 발은 방향을 표시, 여성은 매춘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차로 오른쪽에 매춘부가 있다는 뜻이다.  동전 구멍만큼 돈이 있다면 방문하세요.  네모박스는 외상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발 사이즈는 미성년자는 안된다는 의미로 발 사이즈보다 작은 사람은 안된다는 뜻이다.


이런 로마 사회였는데 기독교는 금욕주의를 강조했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 검열을 했다. 술에 취하지 말라고 했으며 기독교인들은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다.  

 

 

박해에 굴하지 않던 기독교인들

112년경 플리니우스 총독은 로마의 속주인 비티니아-폰투스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미풍양속,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기독교인을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  플리니우스는 기독교인들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데 동의했고 기독교인을 사형시켰는데 이때 마녀사냥처럼 고발이 번지면서 플리니우스는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보고 황제는 플리니우스가 잘 처리했다는 답변을 보냈다. 황제는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사형을 내릴 중죄로 규정했다.  

 이 규정으로 인해 기독교 신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고발을 당하면 변론도 못하고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기독교신자들은 순교를 거룩한 죽음이라 가르치고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기독교인임을 밝혔고 순교를 하면 천국으로 가 큰 상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였기때문이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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