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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삼청교육대 실체를 알아보다.

by 365 ^^ 2021. 9. 14.

삼청교육대 만든 배경

박정희 대통령 서거하고 계속되는 권력다툼 끝에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다.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군사 반란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정의 구현'을 내세우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 후 국보위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발표 1980.8.4 하고 상임위원장으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사회 전반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사회정화사업의 일환의 하나로 불량배 소탕 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설치된 삼청교육대이다. (불량배를 새 사람 만드는 곳이라는 인식)

 

 

삼청교육대 뜻, 유래 

'국보위'에 속한 '사회정화국보위원회'가 있었는데 그 위원회의 위치가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해 있어서 삼청교육대라는 의견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몸과 마음과 정신을 깨끗하게 하라는 의미로 '삼청'이란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은 사회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폭력범,사기범, 사회풍토 문란범을 제거 한다는 의미등 다양한 설에 의해 만들어진 삼청교육대이다.

 

삼청교육대를 만든 실질적 이유

신군부의 명분없는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당연히 저항이 많았다. 그 저항을 진압한 사건이 5.18 민주화 운동이었고 5.18 민주화운동을 1980년 5월 27일 진압하고 5월31일 신군부는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공공의 적을 만들어 삼청교육대 교육생에게 찍힌 불량배, 범죄라라는 낙인이 찍혀져 이들의 인권 침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그 폭력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거나 지지하게 되니 대중을 제압하면서도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묘안이었던 것이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의 깡패 소탕 작전,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 1990년대는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이 모두 같은 맥락의 정책들이다. 

 

삼청 계획 5호

신군부가 사회 악과 사회 비리근절이란 명목하에 세운 5가지 계획을 말한다. 김종필, 이후락등을 부정 축재자로 몰아 재산 헌납했고 고위공무원 5천 명을 숙청했다. 이는 새로운 권력에 공무원 줄세우는 효과가 있었고 국민 입장에서는 (시원한 느낌의) 민심 수습효과도 있었다. 

 

  • 1호: 권력형 부정축재자 척결.
  • 2호: 정치 비리자 척결
  • 3호: 부정부패한 고급 공무원
  • 4호: 부정부패한 3급이하 공직자
  • 5호: 불량배 소탕 및 순화교육

 

삼청교육대 대상자 기준

그러나 이들 속에는 범죄자만 연행 된 것은 아니었다. 순화 교육 대상자로 구체적으로 소탕 대상자가 명시되지 않고 현행범에 재범 우려자, 깡패 및 집단 전체, 잘못을 반성 하는 마음 가짐과 태도가 없는 자,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반정부 및 무정부주의자, 전두환을 비방한자 및  허위사실 유포자등이 대상자였다. 

 

'개전의 정이 없다'는 의미는 반성하고 뉘우치는 태도가 없다는 뜻으로 권력자가 보기 껄끄럽고 불온한 사람에게 쓰는 용어

 

군인, 경찰, 공무원등 삼청교육대를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찍혀도 삼청교육대로 연행등 개인적 복수심에 의해서도 지목당할수 있는 너무나 모호했던 기준이었다. 

 

징집과정의 문제점

징집과정에서부터 문제가 많았다. 190개의 경찰서에 할당해 약 80만 명이 투입되었는데 이것은 군.경 동원 인원 자체가 전쟁 수준이었고 서울의 경우 경찰서마다 300 여 명 정도를 검거해야 하는 할당제로 운영이 되었던 것이다. 할당제는 검거 인원을 채우기 위해 기준과 전혀 상관없는 무연고자들, 가난한 사람들 등 불분명한 제목으로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연행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무작위로 일반 시민들을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가죽점퍼 입은 사람, 오토바이 타는 사람, 칼자국, 문신이 있는사람 등이 집중 타킷이 되었다.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인원

1980년 8월부터 약 6개월간 전국의 불량배 혹은 신군부에 반하는 사람들을 검거해 사회악 제거라는 명분하에 순화교육을 삼청교육대에서 실시한다. 검거 목표 약 2만 명을 세우고 2주만에 약 3만 명이 검거되고 그 후 목표 수의 3배에 달하는 전국적으로 6만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렇게 잡혀 온 사람들은 삼청교육대 심사위원회, 분류심사를 거쳐 등급이 나눠져 약 4만 명이 순화 교육이란 명목으로 4주간의 삼청교육대 행이 되었다. 통계를 보면 전과가 없던 사람만 35.9% 달하며 법치주의에 반하는 삼청교육대는 상당히 심각한 인권유린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삼청교육대 위치 

삼청교육대 당시 전직 경찰관의 참회록에 담긴 내용. 

해운대경찰서는 해수욕장이 2개 있다는 이유로 250~300명을 검거해야 했다. 해운대 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 탈의장을 포위했다. 탈의장에 있던 300명이 경찰서로 끌려왔다. 남의 돈을 뺏은 적이 없는지 다그쳤고, 부인하면 자백할 때까지 협박하고 폭행했다. 몇몇 형사는 참다 못해 잠적하기까지 했다. 삼청교육대 대상자 검거가 마무리된 1982년 상부로부터 삼청교육 공문을 비롯한 모든 서류를 소각하는 지시를 받고 내가 직접 불태웠다. 
 

2021년 5월 발견된 삼청교육대 관련 문건이 있다신군부 세력이 5.18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총기 소지자, 폭력배로 둔갑시켜 삼청교육대로 보냈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이 발견되었다. 당시 시민군을 제압하려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계엄군이 삼청교육대 교관이 되어 교화 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잔혹한 훈련을 시킨 교관들의 증언도 있다.  

 

 

삼청교육대 4주간의 가혹행위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최민수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데 그때 삼청교육대를 지옥으로 묘사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밝기 시작하여 공포탄을 총을 쏴 대고 얼굴, 몸 상관없이 군홧발로 차기시작하며 교육이 시작되었다.

 

 

삼청교육대 수칙

시간표는 있었으나 실제로는 훨씬 가혹하게 진행되었고 일명 훈련생 수칙을 외워야 했다.  핵심내용은 이러했다. 

  • 교육대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 신문 잡지 구독 및 라디오 텔레비전 시청은 금한다. 
  • 개인 행동을 일체 금한다. 
  •  주는 대로 먹겠다. 
  •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겠다.  

 

이런 내용이 수칙으로 있었기 때문에 수칙만 봐도 입소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추측이 되고도 남는다. 나중에 진상규명위. 위원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보면. 폭행, 폭행, 폭행 밖에 없다.  

 

옷을 벗긴 다음 찬물을 붓거나 각목과 쇠파이프로 폭행 훈련을 빙자한 무차별 가혹 행위가 계속되었고 결국 도망 가야겠다고 수용자들이 결심하지만 철조망 근처만 가도 실탄을 쐈다. 극심한 인권유린을 일삼았던 삼청교육대에 실상이다.

 

삼청교육대 식사모습 교관들이 먹던 밥을 배식통에 쏟아붓기도 했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증언: 전과 없이 강제 연행돼 B급 분류, 삼청교육대 및 근로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4주간의 교육이 끝이 아니였다. 교육 이수자 중 10,016명은 근로봉사 6개월가 강요되었고 진지 구축, 도로 건설, 통신선 설치 등에 동원되어 "삼청교육대 근로봉사 때문에 강원도 지형이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삼청교육대 사망자 및 피해자 수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집단 구타 후에 사망을 하게 되면. ‘훈련 도중 병이 나서 죽었음’ 하면 끝이었다. 공식 사망자는 54명이었고 그 중에 구타에 의한 사망자는 단 10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후유증 사망자 397명 부상, 장애자 2768명으로 신고가 되어 있지만 더 많은 사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된 사망자가 이 정도이니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은 신고 기록의 20배 정도로 추산된다.

 

삼청교육대 사망자 수

 

삼청교육대 피해자 가족의 증언 기록

1980년 12월 8일  저의 아들은 23세였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취직을 알아보고 있던 차에 느닷없이 경찰 2명이 와서 아들을 연행해 갔습니다.  경찰에게 물어보니 삼청 교육을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내 아들을 무슨 죄가 있어서 삼성 교육을 보내며 거기 가면 많이 죽는다고 하던데 왜 그런곳을 보내는 거냐고 하니 경찰이 하는 말이 요즘은 죽이지 못하게 하니 걱정 마세요. 라고 했다.  

1달 동안 소식이 없어 애태우는 중 강원도 원주 어느 부대에서 아들 때문에 급히 오라는 부대 통지를 받고 가보니 아들이 훈련 중 갈비뼈가 부러져서 오래되어서 부대에서 고칠 수 없어서 1981년 1월 8일 낮에 사망했다고 하였고 나는 그만 그 부대에서 졸도하였습니다.  

 

여자 삼청교육대

4만여 명의 삼청교육 피해자 중 319명이 여성이었다. 그 분들도 대부분이 전과가 없는 평범한 여성들이었고 황당한 이유로 끌려갔다고 한다. 짜장면 내기 화투판을 구경하다가 도박죄로 붙잡혀 오거나 또는 15세 여학생 7명은 명동에서 편싸움을 구경하다 강제로 잡혀가기도 했고 어떤 이는 때를 밀며 손님과 담소를 나누던 중 정치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행이 되었다고 한다.

 

 

삼청교육대 해산 후 삶

1981년 1월 25일 계엄령 해제로 계엄 포고 13호에 입각한 삼청교육대 해산된다. 그러나 계엄령 해제 한 달전 사회보호법이 제정 통과(피해자들의 저항 및 폭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만든 법)되어 교육 기간이 끝난 후에도 정부에서 10년간 전산 관리를 실시하여 취업할때도 자유롭지 못했던 피해자들 수료증과 함께 심지어 주민 등록증에도 기재된 삼청교육 수료 번호하였고 정부는 사후 관리 문서까지 만들어 이들의 퇴소 후 생활을 감시했다.

 

삼청교육을 받으면 발급되는 수료증
심지어 주민 등록증에도 기재된 삼청교육 수료번호

 

4~6주의 사회 교육이 아닌 평생 동안 따라다녔다. 그들을 향한 감시로 인해 온전한 생활이 어려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도 발생했다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해 20년 넘게 정신 병원에 다녀야 하는 피해자도 있었다 보통 사람에게 생긴 트라우마는 한 번의 경험으로 생기는 것들이다. 혐오, 공포, 두려움은 한번의 학습으로도 생긴다. 그런데 삼청교육은 무려 4주 이상의 고통은 평생 갈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인 것이다. 이로 인해 자살, 이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피해자들의 아픔은 곧 가족들의 아픔으로 이어졌다. 지옥에 있는 사람보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 보는 사람들이 더 괴롭다.   

 

 

삼청교육대 미화 언론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당시 전두환 정권이. 이런 실적을 냈다는< 계엄사>  편찬했다. 

 

 

계엄사에는 삼청교육대에 식사 구호가 나와 있는데  이것을 책으로 남겼다는 건 자랑스러워한다 는. 뜻인 것이다.   

 

또한 삼청교육대 미화하는 언론들이 많이 나왔고 언론사마다 전두환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보도가 이어졌던 시기이다.  

 

피해자들의 과거를 매도하고 삼청교육대를 미화한 언론들

 

 

삼청교육대 피해보상은?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방송을 한다. 몇일 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며예 회복이 되도록 하겠다고 공식인정하는 발표를 했으나 실질적인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관련법들이 국회에 계류돼 통과되지 않았다.

 

 

그 이후 노무현 정부 때 삼청교육대 피해자 보상법이 통과되었지만 까다로운 절차와 미미한 보상금으로 인해 삼청교육대 이수자 4만여 명 중 피해 신고자는 불과 4600명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피해 신고를 하면 삼청교육대 출신이라는 낙인찍기 2차 피해를 우려해 두려워했던 것이다. 

 

 

낙인찍기의 위험성

삼청교육대는 교육과는 전혀 상관없었던 곳으로 현재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낙인찍기는 횡횡하고 있다. 낙인 찍기가 위험한 것은 피해자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주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자라나는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활용해 정의롭지 못한 독재 권력이 등장했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부류의 사람들이 이렇다고 쉽게 얘기하면 안된다. 이게 낙인찍기는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선마 19회 일부, 역사저널 그날 3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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