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 이전상황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 차별
북아일랜드의 주요 산업은 조선업이다. 조선업 종사자의 95% 이상이 개신교도이다. 가톨릭교도들은 조선업에서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톨릭교도는 공립학교 입학 불가했고 개신교 학교를 지나갈때 아이들에게 위협 행위를 가하기도 했다. 가톨릭교도들은 2등시민으로 취급당했다. 1945년부터 공공임대 주택이 많이 지어졌는데 이곳도 가톨릭교도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지방선거 투표권 또한 집을 소유하고 있는 세대주만 투표가 가능했다.
개신교도로 집이 여러개가 있으면 여러 곳에서 투표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영국비상권한 법이 있는데 가톨릭교도들을 영장 없이 수색이 가능하고 재판없이 투옥 가능했다. 우리나라의 계엄령과 비슷한 것이다. 심지어는 시위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하는 일도 빈번했다.
16세기부터 영국인 개신교도를 아일랜드를 문명화한다는 취지로 북아일랜드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이주를 시켰고 북아일랜드 지배층이 된 영국인 개신교도는 아일랜드 토착민을 체계적으로 차별하기 시작한다. 공직, 군인, 취업 배제는 물론 투표권 박탈했다. 당시 북아일랜드는 66.2%가 개인교도, 33.5%가 가톨릭교도였다. 소수였기에 더 큰 핍박을 받았던 가톨릭교도이다.
더블린 시내를 지나다 보면 창문이 없는 집이 있는데 영국식민시절 수탈과정에서 세금을 내지 않으면 일조권을 박탈했던 것이다.
1972년 1월 30일 피의 일요일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북아일랜드인에게는 그냥 데리로 불리는 곳에서 1970년대까지도 이어진 가톨릭교도 차별 반대 대규모 시위를 진행 시민들을 폭도로 간주하고 강경 진압에 나선 영국 정부 시위대를 향해 최루 가스, 물대포가 쏟아졌고 영국군 공수부대까지 투입 되었다. 영국군의 발포로 시민 14명이 사망했다. 이것이 30년에 걸친 피의 일요일 북아일랜드 분쟁의 시작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록밴드 U2의 음악 중 Sunday Bloody Sunday가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배경으로 한 곡이다. 이 사건은 아일랜드인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핍박과 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나선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교도들 여성과 아이들 포함 약 15,000명의 시민이 참여한 시위 진압을 위해 영국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실탄을 발포해 모두 14명이 사망했다. 영국 공수부대는제2 차 세계대전 당시 맹활약했던 부대로 나치 독일군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시위를 했던 사람들은 영국군이 중립적으로 질서를 바로 잡아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시민을 향한 발포에 더욱 충격을 받았던 사건이다. 희생자 14명 중 7명이 10대 청소년이었다. 이런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중에 영국군의 피의 일요일을 사건 보고서에는 영국군의 행위는 불법 시위를 진압한 것에 불과하고 시위대가 먼저 발포를 했기때문에 영국군의 시위대를 향한 발포는 정당했다는 결론의 보고서였다. 심지어 시위대를 진압했던 지위관은 기사호칭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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