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새의 정확한 역사 기록은 현재 없다. 현재 발해의 유적은 러시아, 일본, 중국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발해역사에 대해 중국과 한국이 첨예한 대립을 하는 상황이다. 중국은 발해 역사를 고구려와의 연관성은 모두 빼고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중국 교과서에도 중국사로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중국 학생들은 발해가 중국 지방정권으로 알고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중국역사로 만들기 위해 발견된 발해 황후의 무덤을 철저히 공개하지 않고 있고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발해 건국 과정
▶668년 고구려가 멸망했다.
▶고구려 유민을 강제 이주시킨 이유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당나라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에 고구려 유민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요서지방 영주로 끌려간다.
고구려의 중심지는 요동과 평양이었는데 평양지역 유민들은 배를 이용해 산둥 반도로 강제 이주시키고 요동성, 안시성 주민들은 영주로 강제 이주 시킨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염려,봉쇄하기 위해 강제 이주를 시킨 것으로 실제로 고구려의 마지막왕 보장왕이 요동지역에서 말갈족과 모의해 반란을 도모하다 발각이 되기도 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유민들을 끌고 간 것이다.
▶영주 탈출
다른 부족들과 섞여 지내야 했던 이곳에서 감시와 폭정이 이루지고 있었고 굶주림에 영주 도독 조문홰에게 식량을 요청하러 간 거란족 추장 이진충,손만영을 멸시와 폭정으로 대하면서 696년 거란족이 당나라의 폭정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키고 걸걸중상과 대조영, 말갈족 수장 걸사비우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한다.
▶천문령 전투 승리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는 무자비한 공포정치로 악명이 높았지만 영주 민란등으로 당나라 북방 지배체제의 붕괴되면서 위기에 처하자 요동으로 도망친 대조영 무리에게 작위를 내리며 회유했지만 거절당하자 토벌단을 보내고 그 와중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모두 사망한다. 그들을 쫓아오던 당나라 토벌군을 천문령에서 만나게 되고 대조영이 제압해 승리를 거두면서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다.
**측천무후(재위 690 ~ 705)는 당 고종의 황후로 아들인 중종, 예종을 차례로 폐위시키고 690년 스스로 황제가 된 후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치지만 과감한 국정쇄신으로 '무주의 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국의 유명한 동물 판다, 판다 외교가 유명한 중국에서 최초로 판다를 685년에 일본에 평화사절단으로 보낸 사람도 측천무후이다.
▶진국[=발해(698년)] 건국
그 후에 대조영은 동모산에 진국 [=발해(698년)]을 세운다. 처음 발해의 이름은 진국이었다. 동모산에 발해를 세운 이유는 옛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 인근은 신라와 가까워서 위험하기 때문이었고 거란, 당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만주 동모산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대조영의 세력확장에 긴장한 당나라는 화친을 제안하고 713년 당나라는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면서 발해를 인정하게 된다. 이때부터 정식 국호인 발해를 사용하게 된다. 발해를 세운 후 한자문화권에 맞는 새로운 성을 만들어 대조영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발해는 고구려는 계승했다고 선언한다.
발해 고구려 계승 증거
대조영의 두 아들
대조영의 두 아들 대무예, 대문예가 있었고 대조영 다음으로 왕위를 물려받아 무왕이 된다. 당나라의 선제공격을 명령했던 장본인이다. 무왕(무예)는 발해를 대국으로 만든 정복 군주였다. 대문예는 당나라에서 오랫동안 숙위로 있었다. 숙위란 당나라 주변국가들의 왕자들이 당나라 궁궐을 머물며 황제를 호위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문예는 당나라의 문물과 학문을 익힌다.
당나라 흑수부 설치
722년 흑수말갈 추장은 당나라 현종을 찾아오니 현종은 흑수말갈에게 벼슬까지 내리며 환대했고 그 후 당나라로 사신을 2년 동안 4번이나 보내며 당과의 교류를 이어나갔다. 725년 당나라는 흑수말갈 영토에 관청(흑수부)을 설치하고 관리까지 파견하며 발해를 압박했다. 이 당시 흑수말갈은 발해를 통해 당과 교류를 했는데 725년 당과 직접교류를 시도한 것이다.
대문예의 배신
이에 아우 대문예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흑수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대문예는 당과 등지는 것, 자극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무왕은 끝까지 공격을 명령하자 대문예는 토벌하러 가서 다시 한번 상소를 보내지만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으니 당으로 망명해버린다. 이에 당에서는 발해의 왕자가 망명을 하니 벼슬 (좌효위장군)을 제수하고 환대하였다. 반역죄를 저지른 동생 문예를 당 현종에게 처형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당은 발해의 요구를 무시할수도 없어서 대문예를 유배를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다.
무왕의 아들 사망으로 불안정했던 왕위 계승
728년 4월 발해에 비극적소식이 전해진다 . 당나라에 숙위로 가있던 무왕의 아들 대도리행이 사망한 것이다. 왕위 계승자가 사망하자 혼란에 빠진 발해는 당 현종에게 문예 처형을 재차 요구하지만 당 현종을 이를 거부한다. 또한 무왕의 도발에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는 서신을 보낸다.
이 시기의 상황은 당은 거란을 압박하고 있었고 발해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당 나라였다. 거란이 당에 복속되면 당과 국경선을 맞대야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왕이 계승에 불안을 느낀 무왕은 등주를 공격한 것이다.
발해의 등주 공격 (1차 당나라 정벌)
등주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는다. 732년 9월 당나라 해상교역 등주에는 수군 장수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수군이 들이닥친다. 건국 34년 만에 당대 최강국 당 나라를 공격한 발해였다.
시대 불문 중국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등주이다. 등주는 당나라 최대 수군이 있던 곳이고 한반도의 아픔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 한무제(제 7대 황제)가 군대를 출발시켰던 장소, 고구려 침공한 수 형제가 수군을 출발시켰던 곳이기도 하고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대가 출발했던 곳으로 등주를 공격했다는 것은 이런 당나라 중심부의 당나라를 공격한 것이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중국 본토를 공격한 것이다.
등주 전쟁에서 발해는 기습 공격에 성공하고 등주자사 위준은 사망한다. 당 현종은 급히 토벌군을 보냈으나 발해군의 기세를 꺽을 수는 없었다. 이에 당황한 당 현종은 동맹관계였던 신라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한다.
당나라의 보복전
고구려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의 부활이었다. 이에 당 현종은 신라군의 장수까지 직접 지명한다. 그는 바로 김유신의 손자이자 통일신라시대의 재상 김윤중이었다. 김윤중은 중무장한 신라군을 이끌로 발해로 출발한다. 그러나 신라군은 한 겨울에 (733년 1월) 만난 동장군으로 인해 추위에 꺽여 신라군은 그대로 후퇴하게 된다.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발해를 토벌하게 했으나 대문예 또한 실패한다. 이 소식은 무왕에게 전해지고 무왕은 격노하게 된다. 무왕은 동생 문예를 처단하기 위해 당나라로 자객을 보내지만 실패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 문예 또한 죽는 날까지 발해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발해의 마도산 공격 (2차 당나라 정벌)
733년 발해군은 당나라 마도산을 향해 진격한다. 732년 등주 공격에 이은 발해의 2차 당나라 정벌이었다. 2차 공격은 격노한 무왕이 직접 진두지휘를 해 마도산을 공격했다. 당 현종은 마도산으로 지원군을 급파하지만 발해군 제압에 실패한다. 당시 무왕은 발해,돌궐, 거란의 반당 연합을 구축하여 반당 연합에 앞장을 선 거란과 함께 당을 공격한 것이다.
마도산은 당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이 시기에 당 현종은 (양귀비와 좋은 시간 보내기 위해 ) 화친을 요청하면서 이후에 발해는 신라, 거란, 일본과 왕성한 교류를 하면서 해동성국(바다 동쪽 번성한 나라) 이라 불리게 된다.
발해의 영토
구당서에서는 사방 2천리(약 8백km), 신당서 사방 5천리(약2천km) 남쪽으로는 니하강을 경계로 신라와 맞닿아 있었고 동쪽으로는 바다를 접하고 있고, 서쪽에는 거란이 있었다. 현재 연해주 만주의 동북지역을 넓게 확보했던 발해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영토가 가장 넓었던 나라이다. 고구려의 1.5배~2배가량의 크기였던 발해이다. 현재 극동 러시아 위치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발해이다.
발해의 교역물
발해의 멸망 이유
우리나라가 참고하는 것은 거란족 요나라 역사서 요사에 남아있는 발해의 멸망 기록이다. 그 책에는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침공 10일 만에 발해가 멸명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정인지 고려사에 기록은 발해는 정확히 926년 멸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조영이 세운 국가인 발해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대조영 혼자 일으켰고 대조영의 뜻을 이어 대대로 해동성국으로 번성했지만 요의 역사서<요사>에 따르면 2번의 전투를 통해 약 10일 만에 발해를 말망 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 내부분열 가능성
당시 거란은 만주를 관통해서 발해 수도 상경까지 6일 만에 도달한다. 이 과정에서 발해는 속수무책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당시 거란 또한 막강했던 시기이다. 발해 멸망 후 거란은 요나라를 건설하고 고려까지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되는 거란족이였다. 역사상 대부분의 왕조가 멸망하는 것은 내부 분열일 가능성이 높다.
925년 경에 남쪽의 고려로 내려온 발해인들이 내려갔던 사례가 발생하는데 발해 내에 정치적 혼란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하고 또한 요나라 역사서에 따르면 발해 내에 이심(마음이 떠나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발해의 혼란했던 상황이 근본적인 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백두산 폭발설
발해의 중심에 위치한 백두산으로 인해 10세기 멸망한 발해는 백두산 폭발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발해 핵심 도읍 발해5경들이 백두산의 영향권에 있었다. 상경 용천부에서 화산의 흔적인 현무암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근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팀이 백두산 근처에서 백두산 폭발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탄화목을 발견하였고 백두산 폭발이 일어난 시기는 최근 (2017년) 탄소 연대 측정법을 통해 화산 폭발시기를 추정한 결과 946년으로 오차 범위 3개월로 추정한다. 발해가 멸망(멸망 926)하기 훨씬 후이므로 일어났던 것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발해가 15일만에 멸망했지만 백제 또한 8일만에 멸망했다. 문제는 멸망 후 발해를 계승한 나라들이 없었고 역사가 기록되지 않아 많은 것들이 남아있지 않은 해동성국 발해였다. 멸망 후 일부 유민들은 고려로 흡수되었다. 현재 발해의 기록은 중국 당의 기록만이 발해를 연구할 수 있는 문헌 자료이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중원 원정(해외원정)을 시도했던 발해였으나 그 끝이 너무 허무하게 끝이나 안타깝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으로 발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3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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