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은 제국을 만들지 않았다. 제국의 땅을 점령은 했으나 통치하지 않았다. 칭기즈칸 사후 제국을 통치하는 것은 2대 카안 우구데이였다. 우구데이 카안부터 유럽을 본격적으로 침공한다.
우구데이 러시아 침공
몽골의 15만 병력을 동원해 현 러시아 루스를 침공한다. 당시 루스는 여러개의 공국으로 분열 되어 있던 상태여서 쉽게 점령을 했고 러시아 공국의 가장 큰 공국인 키예프 공국을 공격 루스 침공 3년만에 전 러시아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키예프 공국이 사라지면서 그 나라를 바투가 통치하게 되고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가 들어서게 된다. (몽골 제국의 분열 이후 설립 된 4대 칸국 중 하나로 서방 침공에 총 지휘관 바투가 통치) 유라시아 대륙에서 몽골이 지배를 가장 오래 받은 지역이 러시아로 240년간 지배를 받게 된다.
주치 울루스를 몰아낸 것이 모스크바 공국이다. 변방 공국이었던 모스크바가 주치 울루스 치하에서 성장하면서 모스크바가 현 러시아의 중심이 된 계기가 된다.
동유럽 폴란드 헝가리 침공
몽골군은 러시아 침공 이후 동유럽인 폴란드. 헝가리로 진격해 들어간다. 이미 이때부터 러시아 난민들로부터 몽골군의 공포감이 전해지고 있었다.
1241년 4월 9일 폴란드vs 몽골 전쟁에서 몽골 승리한다.
헝가리vs 몽골
헝가리 10만 병력은 몽골에 패배한다. 당시 헝가리 인구 1/3이 사망, 납치됐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대패했다. 불과 1달사이에 동유럽이 초토화되었다.
이 당시 기독료 유럽 사회는 몽골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을 막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판 방법이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몽골군은 서유럽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회군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우구데이 카안 사망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 하여 차기 대칸 선출을 위해 몽골 주요 인사가 소집돼었다는 설이 유력한데 우구데이가 사망 후 구육이 선출되기 까지 3년이 걸렸다. 그러나 구육도 2년만에 사망후 5년의 공백 후 몽케가 선출된다.
서방원정 중단
이렇게 10년 동안 서방 침공이 중단된 것이다. 몽골은 몽골제국이 몰락할때까지 왕위 계승에 원칙을 끝내 만들지 못했다. 칸이 죽을 때마다 권력 승계 다툼이 있었고 이것은 고려에도 축복이었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서 피살로 몽골 침입의 명분이 생겼던 그때 1227년 칭기즈칸 사망 2년 후 우구데이 즉위하자마자 1231년에 고려를 침략하지만 갑작스레 사망한 우구데이 칸 사망으로 전쟁 중 휴식을 취하게 된다.
고려 몽골 전쟁 과정 및 김윤후 장군의 활약 /강화 홍릉
(구육칸 시대) 유럽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
이 휴식기에 서유럽은 몽골을 알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4세는 카르피니 수도사를 몽골 수도 카라코룸으로 파견 구육의 즉위식 축하를 위해 보냈는데 가져온 메세지는 경악스러웠다.
교황이 이 답신을 받고 체면을 구기자 신앙심이 깊던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1253년에 루브룩을 파견했으나 똑같이 실패했으나 루브룩과 카르피니가 쓴 몽골기행 책을 쓴 덕분에 몽골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이런 책들이 마르코 폴로의 선구가 되어 유럽인들이 몽골에 대한 관심과 넓은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3세기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 이슬람 문화의 성지와도 같은 이곳도 몽골군의 침공을 피할 수는 없었다. 20년 가까이 계속된 몽골군의 침공으로 바그다드는 1258년 몽골군의 침략에 함락된다.
아시아 유럽 이슬람은 몽골이라는 이름하에 교류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역참 잠(JAM) 장거리 공공, 유통업무를 위한 교통.통신 기관 숙소 및 말등을 구비하는 등의 교역시 터미널로 활용했다.
몽골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세계의 재화, 사람, 사상이 세계 곳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 구육 칸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지 일부가 고려의 종이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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