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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고려 몽골 전쟁 과정 및 김윤후 장군의 활약 /강화 홍릉

by 365 ^^ 2020. 12. 3.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5회 3]


오늘의 탐사지: 강화도 고려산 홍릉

주제: 몽골의 6차 침략 과정 
출연자: 설민석 



강화 홍릉


강화도 고려산 남동쪽 언덕에 고려 23대 왕 고종의 능인 강화홍릉이 있다. 



대부분의 고려 왕릉은 북한에 있으나 고려 고종의 재위 기간은 1213~1259년으로 몽골 침략 시기에 재위했던 왕으로 강화도에 안장되어 있다. 



 고려의 고종 왕릉은 왕릉치고는 규모가 작다. 



조선시대 26대 왕 고종과 이름뿐아니라 무덤 이름까지 똑같다. 그래서 고려 고종의 왕릉은 강화홍릉이라 부른다. 



고려 고종은 강화천도 후 28년간 몽골과 항쟁을 하고 팔만대장경 조판,유학 장려 등 다양한 문화적 업적을 남기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왕이다. 1259년 몽골 6차 침입때 태자(원종)을 몽골로 보낸 후 그해 6월 승하한다. 



몽골 침입 때 강화도는 간척 사업을 하기 전 이여서 좁은 해안선과 빠르고 강한 물살로 외부의 침입이 힘들었던 섬이었다. 



천혜의 요새라고 불렸던 강화도였지만 강화천도 후에도 몽골은 끊임없이 침략한다. 



◈ 몽골의 1차 침입 (1231년) -> 자세히 보기 



최우 집권기에 몽골은 저고여 살인사건을 명분으로 몽골의 살리타는 고려를 침략한다. 귀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개경이 함락되면서 1232년 6월 최우는 몽골 침입 1달 뒤에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한다. 



◈ 몽골의 2차 침입 (1232년)

강화수도 천도 한달 뒤 몽골 살리타의 2차 침입시작된다. 


승려 김윤후의 처인부곡민의

처인성 전투 


몽골군은 용인의 처인성까지 들어오고 정규군조차 없던 처인성에서 백성들은 몽골군과 맞선다. 용인 처인성 부근에 살던 백성들이 2차 침입한 몽골군을 막아내는데 일반 백성들을 이끈 승장은 승려 김윤후였다. 김윤후를 중심으로 고려 백성들이 몽골과의 항전한다. 


김윤후의 활이 노린 단 한 사람, 몽골군의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했다. 


2차 침입은 승려 김윤후의 활약으로 몽골군을 물리친다.



그러나 거란이 침입했을 때 만들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경전인 대구 부인사의 초조대장경​(1011년 ~ 1087년), 속장경이 모두 소실된다.




◈ 몽골의 3차 침입 (1235~1239)

5년간 계속된 몽골의 3차 침입 때 경주의 황룡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 된다.


11세기 고려 최초의 대장경 초조대장경을 만든 후 거란이 물러나자 부처의 힘이 적을 무찌른다고 생각해 다시 몽골의 3차 침입을 계기로 대장경을 만들어서 몽골군을 물리치려 했고


 

이때 만들어진 것이 팔만대장경(1236~1251)이다. 


◈ 몽골의 4차 침입 (1247~1248)

몽골이 쳐들어왔고 이제는 못 막는다고 생각했는데 몽골군은 그대로 다시 되돌아간다. 몽골 제2대 황제 오고타이 칸이 갑자기 죽은 것이다.


몽골로 돌아가 새로운 칸을 뽑아야 했기에 몽골의 4차 침입은 흐지부지된다. 

◈ 몽골의 5차 침입(1253~1254)

5차 침입때 몽골은 강원도 원주쪽으로도 양면 침략하며 빠르게 남하해 경상도 길목인 충주성에서 전투가 발발하는데 철옹성 같은 충주성이었다.


김윤후 충주성 전투 


몽골의 2차 침입때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가 21년 후인 충주성 전투에서도 활약을 하고 있었다.  2차 침입 처인성 전투때 상장군직인 높은 벼슬을 거부하고 변방의 지휘관으로 발령받은 김윤후는 변방을 돌며 지내다 몽골 5차 침입때 충주성에서 방호별감으로 재직중 몽골과 다시 한번 맞닥드린 것이다. 



그러나 기약없이 계속된 전투에 백성들은 지쳐가고 백성들의 사기가 꺽이는 것을 보자 김윤후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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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번이나 몽골군을 맞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김윤후다.  



◈ 몽골의 6차 침략 (1254~1259)

몽골의 침략 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시기는 6차로 완전히 나라가 초토화가 되었다.



죽은 사람들은 땅에 묻힐 수 없었고 몽골인이 지나가는 곳에는 셀 수 없는 시체 더미로 가득했다. 힘없는 백성들은 그들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고려는 점점 피폐해졌다. 




몽골로 떠나는 태자 (훗날 원종)

몽골의 요구는 태자를 보낼 것을 요구했으나 태자의 병을 핑계로 거부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 고종은 태자를 몽골로 보낸다. 


몽골로 향하던 중 태자가 만나야 할 몽케 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몽케 칸이 죽은 후 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후계자 경쟁이 벌어지고 새로운 칸의 유력 후보 중 하나인 몽케 칸의 동생 '아릭 부케'는 몽골의 수도를 점령하고 몽골 실세로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칸의 후보 '쿠빌라이' 였다. 


당시 태자였던 원종의 선택은 쿠빌라이였다. 


원종이 쿠빌라이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몽골의 실세는 '아릭 부케'였지만 들리는 소문애 쿠빌라이의 비범함을  원종이 간파하고 쿠빌라이를 찾아간다. 

후계자 싸움 중이던 자신에게 인사를 온 고려의 태자를 보고 기쁜 마음으로 환대를 한다.



이때 원종의 아버지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몽골과 강화체결 

차기 칸의 후보 쿠빌라이를 몽골의 황제로 대접한 원종은 쿠빌라이의 마음을 얻어 정중한 호위를 받으며 고려로 돌아와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 이후 쿠빌라이 또한 몽골의 칸이 된다. 이에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고려가 몽골의 신하가 되겠다고 서신을 보내는데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6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이에 쿠빌라이는 6번 조항 만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수락한다. 


원종의 왕권 강화 정책 


그러나 아직 고려는 친원파 무신 김준이 권력을 잡고 있는 무신정권 시기였기에 왕권 강화를 위해 몽골과의 관계를 유지할 방법이 필요했고 이에 원종의 아들(훗날 충렬왕)부터 몽골의 공주와 혼인을 수차례 혼인을 요구하고 쿠빌라이는 결혼을 승낙한다.  


이렇게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충렬왕 이후로도 고려 왕실은 지속적으로 몽골과 혼인을 했고 반몽반려인 고려 왕실을 무신들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무신 정권
임연, 임유무 

이때가 여전히 무신 정권기로 무신 김준이 세력을 쥐고 있었다. 김준은 원종의 친몽 정책을 반대했고 이에 원종은 김준을 제거하려 한다.



그때 나타난 무신이 임연, 임유무 부자였다.


원종의 계획대로 임연이 김준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들은 원종이 몽골을 등에 업고 왕권 강화에 힘쓰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해 한다. 지난 100년간 무신이 왕위에 있었으므로


 

왕이 무신 위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이에 임연은 권력 유지를 위해 원종을 폐위 시킨다. 


원종의 되찾은 왕권

 

당시 몽골에 있던 원종의 아들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아버지의 왕권 복위 도움을 요청하고 몽골의 군사력을 빌려 원종은 왕권을 되찾는다. 이후에 임연은 원종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움에 떨며 지내다 그만 등창이 나서 죽음을 맞이한다. 


다음 무신정권을 이어받은 임연의 아들 임유무는 결국 원종에 의해 제거되고 이렇게 무신정권은 막을 내린다.  


한편 원종은 개경 환도를 추진하고 이를 반대하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삼별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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