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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강화도에 고려 궁지가 있는 이유는 ? 강화도 수도 천도 배경 알아보기

by 365 ^^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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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4회 3]


오늘의 탐사지: 강화도 고려궁지

주제: 고려의 강화도 수도천도
출연자: 설민석 



고려 강화천도 배경 알아보기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했는데 그 때는 칭기스칸의 후예 몽골의 침략 시기로 최우 집권기였고 몽골 침략의 전조는 최충헌 정권 때 있었다. 


몽골 침략 전 동아시아 정세


고려 초에는 여진,거란,고려, 송나라가 있었는데


100년이 지나 여진이 급성장하면서 금나라를 건국한다. 


금나라는 거란족을 없애고 거란족은 나라를 잃고 흩어지게 되고


여진족이 다시 송나라도 멸망시킨다.


남송만이 남아 있고 실질적으로 금나라가 최강자였다. 그러다가 몽골이 등장한다.  



몽골의 세계정복 


몽골은 서쪽으로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점령 헝가리, 오스트리아까지 점령했다.


몽골의 기마부대가 무서운 이유는 보급부대가 없었다. 전쟁에 나갈 때 1인당 말 3~4필을 데리고 나가서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꿔 타며 속도를 높이고


게다가 시력은 3.0 이상으로 몽골인들은 워낙 말을 잘 다루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거칠 것 없었던 몽골의 세계정복 시기로 동쪽으로 고려까지 내려왔던 몽골이었다. 몽골은 남아있던 거란족을 제거하기 위해 내려왔다가 몽골의 상대가 안되는 거란족이 고려쪽으로 도망을 온다.

  


그때 고려의 집권자는 최충헌이었다. 



강동성 전투 

거란족은 몽골을 피해 도망을 와서 고려를 약탈한다. 그러나 고려에는 침공한 거란족과 싸울 군인이 없었다. 능력 있는 군인들은 모두 최충헌 사병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거란군의 침략으로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고려였다.



뒤늦게 최충헌은 거란족을 토벌하기 위해 강동성에 군사를 보낸다.


그런데 그곳에서 원나라 몽골족과 조우하게 되고 당시 거란족을 쫓아 고려로 들어온 몽골군은 거란족 토벌을 위해 고려와 동맹을 제안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던 고려는 바로 동맹을 맺어


거란족 토벌에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1218년 12월 강동성 전투이다.


이때 고려는 몽골과 처음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그러나 이름만 형제의 맹약일 뿐 몽골족은 고려를 지배했다고 생각했다. 



몽골 사신 
저고여 살인사건

어느날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를 방문해 고려가 바친 조공품을 왕에게 던져버리고 한껏 진상을 부리고 돌아간다. 1225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고려에 방문한 저고여가 압록강 부근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추정 가설 3가지가 있다. 


1. 고려가 범인-> 고려에서 활을 쏴 내쫓았다.

2. 몽골과 고려 사이를 이간질 시키기 위해 동진(금나라 무장들이 세운 나라)이 살해 

3. 몽골의 자작극- 고려 침략을 위한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몽골의 1차 침입(1231년)


6년 후 저고여 살인사건을 명분으로 갑자기 고려를 침략한 몽골이었다.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고려가 탐탁지 않았을 몽골은 고려가 금에 기울었다고 판단해서 몽골이 1차 침입을 하고


6년 전 저고여 살인 사건을  침략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몽골 1차 침략
귀주성 전투 

1231년 몽골의 1차 침략이 시작되고 압록강의 정주성을 공격한 몽골을 김경손 장군과 12명의 병사들이 끝까지 치열하게 싸우다가


귀주성으로 이동하여 박서 장군과 연합하게 되고 귀주성을 공격하는 몽골군은 철옹성 같은 귀주성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몽골군은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이때 박서 장군이 쇳물을 부어 철벽 방어를 하고


귀주성 남문에서 방어 중이었던 김경손이 나와서 깃발을 든 깃발병을 공격하여 통신이 두절 몽골군이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몽골군을 격퇴하게 된다. 


김경손과 박서장군의 연합작전으로 몽골의 1차 침략을 막은 것이다. 사료에 승리를 자축하며 김경손이 소금을 불며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강화 천도 

귀주성 전투 중 결국 개경까지 함락되자 최우는 화친을 제안하고 화친을 맺은 후 1232년 6월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한다.


도읍이었던 개경은 당시 인구가 30~50만 명 정도로 굉장히 큰 도시인데 백성들이 강화도라는 섬으로 오게 되니 강화천도를 반대하는 대신들은 참수를 시키고 음력 7월 장마때 천도를 하니 아비규환이었다. 


강화천도 후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어 기르는 돼지, 소등의 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그 와중에 최우는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 없고 자신은 여전히 호화로운 삶을 이어갔다. 






고려궁지


고려의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로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새로운 궁궐을 건립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고려 궁지의 정문

승평문 



개경 만월대(고려 궁궐)의 문과 비슷하게 제작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 궁지의 뒷산 이름이 송악산이여서 이곳의 산도 개경에 있는 송악산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원래 수도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려했던 강화도의 궁궐로 주로 고려의 유적은 북한 쪽에 속해 있는데 고려 궁지는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남아있게 된 고려의 유적이다. 


몽골을 피해 1232년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후 1270년 개경으로 환도 할때까지 39년간 사용된 고려 왕궁 터이다.  



그 후에 조선 시대에는 이곳이 행궁으로 사용되었고 고려 시대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 때 인조가 피신한 곳도 강화도라 조선시대 건물도 함께 남아있다. 


외규장각은 조선시대 왕실의 도서관으로 쓰이던 곳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외규장각 뒤쪽으로 올라가면 외규장각 넘어로 적의 침략을 알아보기 용이한 위치로 강화도 일대가 모두 보인다. 



2부 끝



▼이전, 다음 내용 보기 


☞무신정변의 원인과 경과 1부


고려 몽골 전쟁 과정 및 김윤후 장군의 활약 3부


삼별초 항쟁 역사(배중손,김통정 장군)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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