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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목동 개발의 숨겨진 이야기 (전두환 정권 부동산 정책) 424

by 365 ^^ 2023.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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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게임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이 서울 재정비에 나선다. 종합 경기장, 상업시설 아파트 단지까지 잠실 목동 쪽에 들어서게 된다. 한강도 수질개선을 한 후 여가공간을 조성 다목적 한강종합개발을 하였다. 1984년 교통 쪽에도 강남-강북-잠실을 연결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한다.  

 

국제대회를 앞두고 서울의 낙후지역에 대규모 아파트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아파트 공화국이 탄생하고 대표적인 지구가 목동이다. 침수 피해가 잦았던 안양천 주변으로 판자촌이나 주거 취약계층이 많이 살고 있었다. 

 

 

당시 전주와 전두환 정권은 12.12와 5.17 쿠데타를 통해 정통성이 결여된 채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시급했다 그래서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명목으로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 정책을 추진하며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 500만 호 주택 건설 계획 

그래서 전국에 10년 동안 500만 호의 주택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숫자는 1980년 기준 대한민국 주택 총수가 약 530만 호였으니 얼마나 큰 숫자였는지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동의 건설 붐이 일면서 우리나라는 막대한 외화를 확보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동특수가 소멸하게 되면서 건설업계 위기가 닥치게 된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건설업계를 살려야 경제가 살아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기도 했다.  

 

 

 

목동,개포, 고덕 , 상계지구

1970~80년대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아파트 건설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를 아파트 공화국이 부르는데 그 출발점은 여기서부터 이다. 대표적인 개발지구는 목동, 개포, 고덕 , 상계지구 등이다.  이곳은 택지가 넓으나 주민 거주비율이 낮았기 때문에 대규모개발에 적합한 곳이었다. 특히 목동과 같이 상계동도 판자촌에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목동에는 안양천, 상계동에는 중랑천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기 힘든 지역이었다. 개포동 또한 양재천이 범람해 판자촌 사람들이 살기 힘든 곳이었다.  

 

 

전두환의 졸속 계획

주거 안정은 정권마다 강조되는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으나 전두환의 10년 500만 호는 시멘트, 목재, 철근 등 아파트 건설에 필요한 각종 자재들이 들어가야 되고 또한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두환의 정책은 결국 졸속계획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두환이 5백만호 건설 계획을 밀어붙이게 되고 이에 발맞추어 건설부는 1981년~1991년 500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처음 5년은 공공기업과 민간기업이 각각 100만 호씩 만들겠다고 발표한다. 그런데 1986년 이후는 구체적인 건설 계획이 부재된 상태였다. 이 계획 자체는 1991년까지 이어진 계획이었으나 전두환 정권 임기 이후는 알 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1987년까지 최종 건설된 주택수는 약 176만 호였다. 

 

목동 개발 계획 부작용들

88 올림픽 유치 이후에 전두환 정권은 토지를 전량 매수하는 토지 공영개발 방식을 도입해서 목동과 신정동 일대의 임대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그래서 이 계획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된다. 당시 목동거주자만 약 3만 2천여 명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동개발계획 국내 최대 규모의 개발사업이었기 때문에 25개의 민간 건설업체가 참여를 했고 여기에 1조 2554억여 원을 투자했다. 공영건설은 토지의 수영부터 분양까지 정부의 일괄적인 주도 아래 개발이 이뤄졌다. 국가 주도로 인해 개발 진행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국가 주도 목동 신시가지 건설의 흔적: 아파트 단지 앞 머릿돌이 남아있다.  시행은 시에서 하고 공적인 부분도 공사 감리까지 모두 국가 주도인 전형적인 공영개발의 모습니다.

1년 6개월 단기간에 건축되어 부실공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으나 목동은 아직도 재개발이 안되고 있을 만큼 튼튼한 아파트를 지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이후 아파트를 모두 튼튼하게 만든 역사적 경험도 목동 아파트 개발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 : 한국 아파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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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지개발 촉진법이란? 

또한 목동 신시가지 개발은 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배경에는 1980년대에 만들어진 택지개발촉진법이 있다. 주택건설에 필요한 택지의 취득과 개발 공급 및 관리가 용이할 수 있도록 1980년 12월 30일 제정된 법인데 택. 촉. 법에 따라서 앞서 제정된 법률을 무시하고 개발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이런 법률을 무시하고 택지개발촉진법으로 개발이 가능

 

택지개발 촉진법은 5백만 호 주택건설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택지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정부였기에 전두환 정권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택지개발촉진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사업을 맡았던 곳은 한국토지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였고 목동땅을 매입한 가격이 평당(3.3.m2) 7만 원에서 14만 원이었으나 아파트를 지어 분양할 때는 평당 105~134만 원으로 분양을 했다고 한다. 거의 10배 가격인 것이다. 그 결과 한국토지개발공사도 자산 총액이 1981년에는 약 1320억이었으나 1985년에는 1조 1150억 원으로 엄청나게 늘어난다.

 

 

 

 

당시 한국토지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는 전두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두 기관의 수장은 모두 전두환과 같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 1984년 한국도시개발공사 이사장은 육사 10기 출신으로 5.18 민주화 운동 당시에 광주에 내려가서 시위 진압 임무를 맡기도 했던 사람이다. 

 

기자아파트 건설

또한 전두환은 1983년부터 서울 강남구 일원에 기사들을 위한 아파트를 지은 후 기사들에게 이 아파트를 분양해 준다. 언론회유책의 일환으로 기존의 아파트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기사들에게 분양을 한 것이다. 초반에 언론 통폐합으로 원성이 올라가 있는 기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기자 아파트로 특혜분양(취등록세 감면)까지 했던 전두환 정권이다.   

 


철거민들의 투쟁 

1983년 4월 서울시는 목동일대에 10평 정도의 대규모 임대주택단지를 짓겠다고 발표를 한다. 그러나 그 발표를 한 달 만에 뒤바꾼 발표 한다. 10평이 아니라 20~50평으로 변경한 것이다. 아파트 평수를 늘린 이유는 아파트 면적을 늘려 중산층 이상에게 팔아야 이윤이 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가 서울시에 압력을 넣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기존에 살던 판자촌 사람들은 갑자기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옥당 이주비 50만 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넓은 면적에 따라 분양가가 상승하기 때문에 서민들은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1964년부터 여의도 영등포 회 등 서울시내 무허가 건물에서 살던 사람들이 쫓겨나게 되고 이들이 집단으로 이주한 곳이 바로 목동이었다. 서울시에서 이 철거민들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소유권 없이 한 가구당 26 m2 (8평 정도)의 주거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이들은 이곳에 살면서 공과금 재산세 취득세 등 각종 세금까지 납부를 했기 때문에 무허가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공영개발이 사라진 이유

철거민들은 안양천변 축구장에 모여 서울시청으로 향했고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렇게 목동 거주민들은 3년 동안 계속 투쟁을 하고 결국 무허가 주택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재산권을 인정받는다.  105 가구의 일부 주민들은 끝까지 입주권을 거부하게 되며 빈민운동의 대부라 불리는 재정구 의원의 도움으로 현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으로 옮기게 된다. 

 

목동 개발 이후 공영개발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제는 민간 건설업체에 선투자를 받은 후 합동 재개발 방식으로 시공하는 그것이 정착이 되어 있다. 문제는 민간개발 방식은 이들에게 이윤이 보장되어야 하는 개발이기 때문에 공영개발보다는 경제 논리가 적용되기 쉬워 민간이 공적 권한을 가져가면서 개발 과정에서 더욱 참혹한 광경이 목격되기도 한다. 현재 소유자의 3/4 가 동의하면 나머지 가구는 그냥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나라는 없다.   

 

미분양 사태로 인한 대책 마련

1986년  목동 신시가지가 완공되면서 분양이 시작되었고 1~3차까지 미분양이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서울시에는 뒷단지일수록 층수를 낮추게 되고 학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명문고를 이전한다.  일부 종로의 학교 양정중, 고등학교, 진명여고를 이전한다. 그리고 공기업, 우량기업에 적극적인 판촉 활동까지 하게 된다. 또한 교통을 좋게 하기 위해 신도림역에서 갈아탈 수 있는 도림천, 양천구청, 신정 네거리역등  지하철 지선 공사를 시작한다.

 

 

또한 이후 5호선 개통 계획을 발표된다. 덤으로 1986년 올림픽대로가 개통되면서 목동 신시가지로 올림픽대로가 지나면서 교통 편의성이 확대되었다.   

 

목동은 현재 서울 최고의 부촌 중 한 곳이나 전두환 정권의 부동산 계획은 많은 도시가 획일화되었고 그 속에서 철거민들이 희생당하는 일이 발생하는 어두운 역사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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