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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메디치 가문 이야기 그 시작 조반니 데 메디치 .. (70-1)

by 365 ^^ 2023.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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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치에는 메디치 가문 궁전이 많이 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로 메리츠 가문이 300년 동안 다스렸던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피렌체 곳곳에 남아있는 메디치 가문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 문장
메디치 가문 문장

 

조반니 데 메디치

보잘 것 없던 평민가문에서 성공 신화를 쓰기 시작한 인물은 조반니 데 메디치였다.  조반니 조상들은 피렌체에서 떨어진 무젤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다가 12세기경 대도시 피렌체로 이주했다.  이주민의 후예였던 조반니는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25세 되던 해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조반니 데 메디치
조반니 데 메디치



조반니가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직업은 바로 은행업이었다. 당시 은행은 예금업무와 대출 후 이자를 받기도 했는데 나라간 환율을 고려해 외환거래까지도 했었다. 또한 원거리에 돈을 넘겨주는 계좌이체 업무도 했다. 700년 전에도 현대은행의 기본적인 업무를 처리했던 것이다.

 

 

은행업 시작

조반니는 약 10년 간 은행 직원으로 일하면서 거대한 돈의 흐름을 파악했다.  그리고 친척이 운영하던 은행을 인수했고 피렌체로 돌아와서 동업자들과 새로운 은행을 개업했다. 이것이 바로 메디치 은행의 시작이었다. 당시 피렌체는 중세 유럽에서 은행이 가장 발달한 도시였다.

 

교황청 전담은행되다.

피렌체에서 은행업이 발달한 이유는 교황청은 전 유럽의 수많은 교회 건물과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현금을 관리하던 곳이 피렌체 은행들이었다.  그 중 일부 은행이 교황청의 전담 은행이 돼서 관리했다. 70여개의 은행들이 경쟁을 했고 여기서 메디치 은행이 전담은행을 차지하면서 피렌체의 최고 은행이 된다.  

 

 


발다사레 코사가 메디체 은행을 찾아와 교황이 되려고 하니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조반니는 이를 기회라 생각하고 빌려줬던 것이다. 그리고 발다사레 코사는 1410년 계획대로 마침내 교황이 된다. 이때 그가 받은 교황명이 교황 요한 23세였다. 발다세레 코사가 단숨에 교황이 될수 있었던 것은 가톨릭 교회가 혼란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비뇽 유수(1309~1377)  
당시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기면서 서방 교회 내부에서 큰 분열이 일어났고 교환권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그 결과 아비뇽과 로마에서 두 교황이 대립하게 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사 공의회는 1409년 새 교황을 선출한다. 이렇게 그때는 3명의 교황이 있었던 시기였다.  

 

 

 

새로운 교황 교체
교황이 된 코사는 메디치 은행을 자신의 전담 은행으로 낙점을 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코사 교황이 쫓겨나면서 불과 5년만에 위기를 맞게 된다. 교회 종교회의에서 교황 3명을 모조리 폐위하고 한명의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세운 것이다.  

 


 코사 교황의 부정부패로 인해 한화로 약 350억원에 달하는 벌금을 물게 되었는데 이를 메디치 가문에서 빌려주고 감옥에서 풀려나도록 힘써준다. 또한 피렌체에서 머물 곳과 생활비도 지원해 주었다. 심지어 요한 23세가 죽자 두오모 성당 앞 세례당에 묘까지 만들어준 조반니이다.  

 

요한 23세의 대단한 선물

죽기 전까지 요한 23세는 조반니를 가장 친한 기구라고 부르며 고마워했고 사망직전에 대단한 선물을 남겨준다. 교황의 손가락이었다. 세례요한의 손가락 진위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세 시대에  성자들의 신체 일부는 엄청난 보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이 손가락은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메디치 가문의 보물로 전해지고 있다. 

 

 

산 조반니 세례당 내부
산 조반니 세례당 내부
청동으로 장식된 요한 23세 영묘
청동으로 장식된 요한 23세 영묘
요한 23세의 손가락 보물
요한 23세의 손가락 보물



조반니는 은행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과 신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끝까지 교황을 도왔던 것이다. 요한 23 세를 통해 귀환고객을 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대하는지를 세상에 보여준 것이다. 이후 새로 즉위한 교황 마르티노 5세가 1420년 메디치 은행을 전담 은행으로 다시 선택하면서 기존의 전담 은행 보다 약 3배 이상의 자금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 메디치 가문 문장 만들다.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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