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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마녀사냥은 왜 언제 시작되었나? 55회

by 365 ^^ 2022. 8. 21.

2000년에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발표한 사과문이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2천 년 동안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과오에 용서를 구한다. 는 내용이였다. 마녀사냥에 대한 얘기이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발표한 사과문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발표한 사과문

중세 시대 교회의 영향력 

 

5~15세기 중세 시대 교회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기독교는 4세기에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전 유럽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 안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바로 교황이었다.  

초대 교황 베드로는 가톨릭의 수장이자 로마의 주교 바티칸 시국의 군주였다. 사람들은 신이 교황이라는 대리인을 내려보냈고 교황과 교회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으로 이끈다. 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하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고 교황은 왕들과 함께 중세 유럽의 질서를 유지하는 거대한 두축으로 자리매김한다. 왕이 지방 곳곳에 있는 영주와 귀족들을 통해서 나라를 이끌었다면 교황은 각 나라에 주교를 파견해 사람들의 영혼을 이끌었다. 

 

 

 

 


그런데 교회의 힘이 점차 강력해지면서 교황의 왕 힘의 균형이 기울어지는데 교회의 법이 국가의 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교회가 범죄로 지목한 것에 왕국도 협조했고 전 유럽의 군주들에게 군대 소집 명령이 내려졌다. 교황권에 맞서는 황제의 무릎을 꿇리기도 했다.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왕의 대관식을 보면 왕이 교회에 무릎을 꿇고 교회에 맹세를 한 후에야 왕으로 인정받는 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

 

 

샤를 7세 대관식 모습
샤를 7세 대관식 모습
교회에 맹세 내용/ 왕이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권력이 커지는 성직자들은 부패하기 시작해 성직을 돈으로 팔며 부를 축적하기도 했고 불륜을 저지르고 사생아 출산하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교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였다. 

 

알비,툴루즈 위치
알비,툴루즈 위치


교회 비판 세력 알비파 (이단의 탄생)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순결하지 않은 성직자를 비판하고 급기야는 교회를 전면 부정하며 십자가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교회는 이런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교회를 이단이라고 불렀다. 기존 교회의 정통 교리에 다른 해석을 내세우면 이단으로 지목했다. 교회에 반기를 들면 이단으로 낙인찍은 것이다.

 

이런 교회는 이단으로 지목한 알비파를 토벌하기 위해 1209년에 십자군을 결성해 프랑스 남부로 파견했다. 교황 인토켄티우스 3세는 알비파 토벌을 위해 십자군을 파견했고 주로 프랑스 북부 기사들이 참전했으며 남프랑스의 알비파 영주들과  전투를 벌였다.

 

종교재판소 설치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도 교회 비판 세력이 퍼져 있었고 교회는 권위를 지키기 위해 반기를 드는 세력을 제압했다. 그래서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기 시작한다. 자체 감옥을 운영했으며 고문의 사용도 허가했다.  이 종교재판소에 이단 심문관과 종교재판관들을 파견했다.

 

이단을 고문하는 모습
이단자를 고문하는 모습

이단을 잡아들이는데 열의에 불타 있던 이단심문관들은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마녀도 이단으로 포함시키자는것이었다.  교회에서 내린 이단의 정의가 그 단초가 되었다. 사악한 힘에 물들어서 악마를 숭배하는 대역죄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당시 마녀는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들로 여겨지지 않았다. 

 

중세 마녀란? 
마녀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주술이나 마법을 믿어왔는데 초자연적 힘이나 주술로 다른 존재의 삶과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과거의 마녀는 역초사, 의사, 치유사, 약사, 산파, 무속인을 겸했던 존재를 마녀라는 불렀다. 이런 이유로 마녀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했었다. 그러나 1318년 상황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마녀사냥의 시작

교황이 마녀사냥을 해도 된다는 허가를 처음으로 내린 것이다. 1317년 교황 요한 22세가 암살을 당할 뻔한다. 그리고 그 범인이 교회의 사제였던 주교였다. 그런데 교황을 암살하려 했던 방법이 주술이었다. 이것의 파장이 엄청났고 마녀를 이단자로 단정할 논리적 근거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이단자와 마녀를 혼동하며 마녀사냥을 허락한 것이다. 

이후 1320~1350년 프랑스 남부에서 약 600명의 마녀가 기소되고 약 400명이 화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14세기에 터진 악재들로 마녀사냥의 광기는 더욱 폭발하게 된다. 



마녀의 인식이 바뀐 이유 

14~18세기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약 2도씩 내려갔고 이 시기를 소빙하기라 불렀다.  이 모습은 단테 <신곡:지옥편>에 묘사한 제3지옥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단테 &lt;신곡:지옥편&gt;
이 모습은 단테 <신곡:지옥편>


이 지옥을 하염없이 춥고 저주받은 비, 우박 눈이 내리는 가운데 악마가 영혼들을 찢어발기는 곳으로 묘사했다.  14세기 초 기후 변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매서운 추위가 이어진 소빙하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농사는 심각한 흉작을 맞게 되고 음식이 부족해 대기근까지 왔다. 그런 유럽에 또 하나의 천재지변 흑사병 페스트가 나타났다. 이 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인 인류 역사상 최악의 팬데믹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잉글랜드(1337~1453) 백년전쟁까지 이어지면서 유럽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세상이 이렇게 불행해 지는 것이 악마의 탓이라고 믿게 되고 악마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불안에 빠진 사람들은 주변에서 악마와 결탁한 원흉을 찾기 시작했고 이들이 마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484년 마녀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교령을 발표하면서 이전까지 착한 마녀의 존재를 믿었던 인식마져도 뒤바꾼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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