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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마녀사냥은 어떻게 사라졌나? (뤼됭 마녀재판, 과정)

by 365 ^^ 2022. 8. 23.

(이전 내용)마녀의 망치 :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책)

 

교회가 마녀를 범죄자로 낙인찍은 후 국왕이나 영주, 자치도시 등 세속의 권력이 관장하던 사법기구에서도 마녀를 재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기준이 없이 자신들의 상식과 지식 기준에 맞춰 자의적으로 처벌을 행해지게 된다.

 

마녀 사냥의 희생자들

1580년~90년대 프랑스 알자스-로렌지방에서 가장 많은 마녀사냥이 일어난 곳으로 이 지역에 유명한 치안판사 한 명인 니콜라 레미는 자신의 책에 약 800명 이상의 마녀 처형과 재판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마녀재판은 각종 복수의 수단 또는 이해관계가 걸린 싸움의 도구로 이용된 경우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혼자사는 노인,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이었다. 이 중에 특히 마녀로 많이 몰렸던 산파가 있었다. 당시 정식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오랜 세월 출산 경험을 쌓은 산파들을 직업적인 경쟁상대로 여겨 온갖 헛소문을 퍼트려 마녀로 몰아세웠다.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마녀로 몰려 희생당한 산파가 많았다.

 

 

마녀재판 과정

마녀재판의 과정에 재판소까지 끌려와야 했던 마녀 혐의자들은 얼굴에 철가면을 씌운채 끌려왔다. 심문에서 공통적으로 묻는 첫 번째 질문은 너는 악마를 믿는냐 였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없다. 악마를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면 성경을 부정하는 이단이 되는 것이고 악마를 믿는다고 대답하면 질문과 추궁을 통해 마녀로 판결되던 재판이었다.

 

마녀 혐의자들의 옷을 다 벗긴 후 온 몸의털을 밀어 악마가 몸에 남긴 표식을 찾기 위함이었다. 몸에서 작은 점 또는 흉터가 발견되면 악마의 표식으로 의심을 받게 되고 악마의 표식은 바늘로 찔러봐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심문관들은 15CM정도로 깊숙이 찔러서 고통을 느끼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안아픈 부위가 나올때까지 계속찌르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사람을 묶어놓고 물에 떨어뜨렸는데 물이 마녀를 밀어낼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또는 불로 달궈진 쇠판 위를 걷도록 했다. 악마의 하수인이라면 불에 닿아도 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백이었다. 악마를 숭배하는 것은 영혼의 죄라고 생각했던 시대였기에 스스로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만 마녀라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다양한 고문을 했던 것이다.

 

다양한 고문이 벌어진 스페인 심문실의 모습
다양한 고문이 벌어진 스페인 심문실의 모습
고문도구 중 하나 유다의 요람
고문도구 중 하나 유다의 요람

이들이 이렇게 잔인할수 있었던 이유는 마녀는 인간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정의편이라고 믿었다. 마녀를 고문하고 자백을 받음으로써 세상을 정화시켰다고 믿었던 것이다. 마녀로 밝혀지면 향하는 곳은 단 하나 화형대였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공개 화형이었다. 이 시대는 마녀가 너무 많이 잡혀와서 집단화형이 이루어지는 때도 많았다. 집단화형으로 인해 장작마져 부족해지는 상황이었다.

 

마녀 화형 준비 모습
마녀 화형 준비 모습

 

 

마녀 사냥을 이용한 사람들

마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마녀 재판을 이용하는 지역의 영주와 관리들같은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마녀재판은 왕의 권력을 알리는 무대로 이용되기도 했다. 재판하고 화형에 필요한 돈을 마녀로 몰려 죽은 사람에게 받아 내기 위해 재산을 몰수 했다. 심지어는 마녀 사냥뒤에 뒷풀이 연회비용도 청구했다.

 

마녀 처형 요금표
마녀 처형 요금표

 

마녀 사업

 이로 인해 마녀사냥은 어느덧 마녀사업이 되었다. 이로 인해 마녀를 알아볼수 있다는 마녀 감식인까지 등장한다.  마녀 감식인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녀를 수백 명씩 고소했다.  유럽 최대의 마녀사냥지로 꼽힐 만큼 광풍이 몰어쳤던 독일의 트리어가 있다. 1580년부터 약 10년간 이곳에서는 광적으로 마녀재판이 일어나게된다. 그 결과  22개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면벌부->개신교 탄생->종교전쟁까지

16세기 로마 카톨릭의 쇄신을 요구하며 일어난 종교 개혁으로 인해 교황 레오 10세는 권위를 높이기 위해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막대한 건축비가 필요했다.

 

성 베드로 성당
성 베드로 성당

이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팔기 시작한 것이 면죄부이다. 정확하게는 면죄부가 아니라 면벌부이다. 이를 보고 마틴루터는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면벌부와 교황을 비판하였다. 결국 루터와 칼뱅은 개신교를 만들었고 이것은 유럽의 질서는 송두리째 뒤흔든 변화였다.  구교와 신교는 마침내 종교전쟁으로 번지게 되고 유럽 곳곳에서 100년이 넘게 종교전쟁은 이어지고 약 8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면죄부=면벌부
면죄부=면벌부
개신교 영역
개신교 영역

 

마녀사냥의 절정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마녀사냥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시기가 종교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녀사냥을 주도한 인물은 요한 폰 쇠넨베르크 대주교였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를 되찾는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22개의 마을에서 약 370여 명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광기는 극에 달해 마녀는 이제 신분을 가리지 않게 된다 .이때 사망한 370명 중 108명은 귀족이나 행정부 고위직이었다. 마을 2곳이 전멸하고 다른 마을 2곳에선 여성 2명만 살아남았다.

 

개신교도 마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지 않았다.  개신교의 마녀사냥이 격렬했던 지역은 개신교 국가인 스코틀랜드였다.  당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는 오늘날 개신교에서 가장 많이 읽는 킹 제임스 성경을 만들었던 왕으로 직접 마녀재판을 주관하기도 했다.  이 시기 스코틀랜드해서는 약 3000명 이상의 마녀가 처형되었다.

 

 

뤼됭 마녀재판

이런 분위기에 마녀에 대한 의심에 불을 지핀 프랑스에서 마녀 재판이 이루어진 뤼됭 마녀재판이 있다. 이곳에서 스스로 악마에게 씌였다고 자백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루됭 시 우르슬라 수녀회 소속 수녀였고  그녀는 기괴한 모습으로 팔다리를 비틀고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우르술라 수녀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17명의 수녀들이 같은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수녀들의 진단을 위해 루됭 시에 성직자들이 모이게 되고 진단결과 악마에게 씌윈 마녀로 진단이 나왔다. 그리고 원장수녀의 몸에는 무려 6마리 이상의 악마가 깃들어 있다고 진단했다.

 

 

엑소시즘을 행하는 성직자의 모습
엑소시즘을 행하는 성직자의 모습

 

가장 신성한 수녀의 몸에 악마가 깃든 것은 초유의 사태였다. 그래서 수녀들에게 구마의식 엑소시즘을 행하게 되고  이 구마의식에 악마에게 정체를 물으니 (너는 누구냐?) 루됭 교구사제로 있던 위르뱅 그랑디에 신부라고 지목한 것이다.

 

수녀의 몸에 깃들었다는 사탄 악마들
수녀의 몸에 깃들었다는 사탄 악마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루이 13세의 왕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17세기 초반만 해도 지방 귀족들과 영주의 힘이 강했던 시기로 리슐리외는 지방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도시의 성벽을 제거등의 일을 벌였다. 이런 리슐리외의 행보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그랑디에 신부였다. 그래서 리슐리외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마녀재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고 많은 대중 앞에서 그랑디에 신부의 재판이 열리게 된다.

 

가혹한 고문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그랑디에 신부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마녀재판의 가장 중요한 자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은 악마의 하수인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랑디에 신부는 산채로 화형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은 마녀사냥에 대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마녀재판에 대한 의심 확산
악마가 된 수녀의 모습을 보고 참인지 거짓인지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고 그라운드의 신부가 세력 다툼에 희생 당했다는 의심도 싹트기 시작했으며 어느새 여론은 마녀와 마술, 악마가 거짓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또한 100년 넘게 유럽을 휩쓴 종교전쟁도 일단락되면서 마녀사냥의 광기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마녀사냥을 종식시킨 왕은? 

프랑스에서는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경력한 왕 루이 14세가 등장했고 태양왕은 마녀사냥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부인 14 제는 자신의 명령 아에서 프랑스가. 통일된 사법 체계를 가지기 원했고, 절대 권력을 가지길 원했으나 이 사법 체계를 통일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었던 것이 바로 지방 재판소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고 있는 마녀사냥이었다. 

그래서 부인 14 세는 왕권강화를 위해서 마녀사냥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마녀 감식자들이 마녀 24명을 고발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4세는 사형을 면해주고  지방 재판관이 몰수한 재산도 돌려준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즉위 40년이 지난 1682년 공식적으로 마녀재판을 왕령으로 금지시킨다. 마녀재판은 미신이라고 규정하며 마녀는 악의 세력이 아닌 사기꾼이나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여겼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의 다른 나라도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마녀사냥은 종식된다 .

마녀사냥은 단순한 미신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교회, 영주, 왕 ,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세력확장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던 마녀라는 절대 악을 만들고 이용했던 것이다. 마녀사냥과 같은 무지와 폭력을 경계하고 깨어 있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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