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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독재자 나폴레옹 ~워터루 전쟁 그리고 죽음

by 짱신나^^ 2021.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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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황제가 되기 위해 무엇을 했나?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이후 국민들의 기대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1808년 스페인 왕실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했고 이에 나폴레옹은 스페인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맏아들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로 부른다. 그리고 스페인의 왕자리를 형 조제프에게 주려고 한다. 이에 스페인의 마드리에서 반대시위가 일어난다.  

 

1808년 5월 3일 학살 

 

나폴레옹의 왕위 찬탈을 분노한 마드리드 시민들이 봉기를 기록한 그림이다. 

 

1808년 5월 2일 (프란시스코 고야 작)

이에 마드리드(프린스페피오 언덕)에서 끔직한 학살사건이 벌어진다. 

1808년 5월 3일 봉기의 가담했던 사람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사건을 기록한 그림이다.

 

처형 직전 절망에 빠진 스페인 국민의 잔인한 학살 모습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학살 장면의 교과서로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이에 스페인 전역에서 프랑스 군대에 대한 봉기가 일어나고 이에 나폴레옹 형 조세프가 스페인 군대와 싸우게 되고 결국 스페인 군대와의 전쟁에서 조세프는 패배하게 된다. 전쟁 패배 소식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자 나폴레옹에 대한 전쟁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아이티 노예 학살

 

그러나 스페인 학살 이전에도 나폴레옹의 군대는 또 다른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은 아이티라고 불리는 섬(당시 생도맹그) 전세계 설탕의 주요 공급 중 하나로 프랑스의 가장 값진 식민지였는데 아프리카 노예의 노동력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던 프랑스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던 그때 아이티에서 혁명이 발발해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프랑스로부터 아이티 노예들은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되고 나서 아이티에서 식민지 제국을 제대로 만들어보고자 아이티에서 노예제도를 부활시킨다.  이에 더욱 저항이 거세진 아이티 노예들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저항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 이때 나폴레옹은 흑인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12세 미만의 아이들만 제외하고 여자든 남자든 산 속에 있는 모든 흑인을 죽였고 목에 무거운 자루를 메달아서 흑인들을 바다의 수장시키는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나폴레옹의 인종차별 주의 논란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프랑스 군대는 흑인뿐만 아니라 유색 인종을 죽여서라도 노예제도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는 독립군의 거센 저항과 함께 전염병인 황열병으로 인해 2년만에 철수하기 된다. 

 

언론탄압,검열강화 

국민 투표를 통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과 자신은 부르봉 왕가와 다를 것이라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권력욕에 맛을 들인 나폴레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기사를 썻던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어 언론을 통제하고 검열을 강화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언론을 조성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이후 신문의 수가 급감한다.  

 

 

또한 나폴레옹은 언론은 물론 시민들을 20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시민들의 입도 막아 버린다.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와 같은 장소에는 경찰들을 보내서 감시를 하도록 했다. 이렇게 언론의 자유를 탄압했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독재에 대해 혼란한 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민 스스로 속박한 것이라고 자신의 독재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나폴레옹을 존경했던 히틀러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는 제2의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1940년 나치 독일에 의해 파리가 함락당했을 때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가 향한 곳은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였다. 나폴레옹 무덤 앞에서 모자를 먹고 존경을 표시하는 히틀러의 모습이다.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선물로 오스트리아의 있던 나폴레옹 아들의 시신을 앵발리드로 옮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무덤앞에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는 히틀러

 

그러나 나폴레옹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나폴레옹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결혼 후 10년 동안 후사가 없었는데 조세핀이 나폴레옹과 결혼하기 전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불임을 의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불륜을 저지른 상대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임신을 하면서 자신이 불임이 아님을 확신하고 조제핀과 이혼을 결심한다.  

 

나폴레옹은 가난한 귀족 출신이었고 자신의 황제의 권위가 다른 나라의 황제 권위와 비교했을 때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강력한 나라의 여인과 결혼을 원했다.  

 

 

오스트리아 황녀와 재혼

이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공주(14세)와 결혼을 원했으나 러시아가 이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먼저 제안을 한다.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를 결혼 상대로 제안하지만 마리 루이즈는 자신의 고모 할머니인 마리앙투아네트를 처형 시킨 프랑스를 증오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을 가리켜 코르시카의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국익을 위해 결국 나폴레옹과 결혼을 하고 나폴레옹이 그토록 원하던 나폴레옹 2세가 탄생한다.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는 나폴레옹

대륙 봉쇄령

나폴레옹은 2세가 태어나자 러시아 원정을 시도한다. 당시 유럽 바다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 해군 그 중심에 있던 넬슨 제독 때문에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은 번번이 좌절했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간접적으로 영국을 공격하는 전략으로 대륙 봉쇄령을 내린다.

 

대륙 봉쇄령
대륙 봉쇄령

 

러시아 원정

 

그러나 대륙 봉쇄령을 무시하고 영국과 교류를 한 러시아를 1812년 6월 침공한다. 1812년 9월 14일 나폴레옹 군대는 모스크바에 입성하지만 도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 에 입성한 당일 그 도시에 대해 화재가 발생한다.  4일간 계속된 화염으로 모스크바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보급품을 최소화하고 현지에서 보급품을 조달하던 전략을 펼쳤기 때문에 이것은 정말 큰 재앙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겨울이 오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9월 중순임에도 영하20도의 강추위가 불어닥친 러시아였다. 이렇게 모스크바에서 한달 정도 버티던 나폴레옹 군대는 결국 퇴각을 결정한다.  러시아에 돌아오는 길은 정말 처참했다.  61만 명 중 40만 명이 사망한 참혹한 원정의 결과였다.

 

 

러시아 원정 참패로 깨져버린 나폴레옹의 불패신화로 인해 주변국은 서둘러서 백만대군의 반불 동맹을 결성해 1814년 3월 31일에 파리에 입성하고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반불 동맹의 압박으로 자신과 자신의 후계자가 황제 자리를 포기하는 조약에 서명을 한다.

 

 

나폴레옹 엘바섬 유배

그리고 나폴레옹은 결국 엘바섬에 유배되어 프랑스의 혁명 정신이 유럽으로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반불동맹 세력은 영국에서 숨어살고 있던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를 프랑스로 데려오고 그를 다시 왕위에 즉위시킨  부르봉 왕조를 복귀시킨다.  

 

 

나폴레옹 재집권 성공

부르봉 왕실이 복귀되자 시민들은 많은 반발을 했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복귀를 바라는 지지세력이 있다는 것을 읽고 9개월 동안의 유배생활을 뒤로하고 그들을 모아 엘바섬을 탈출 후 다시 군대와 민심을 장악하고 재집권에 성공한다. 이후에 프랑스 민중이 원하는 입헌주의를 약속하게 되고 프랑스에 적대적인 나라들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노력한다.  

 

워터루 전투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런 기세를 두려워하던 여러 유럽국가들은 나폴레옹의 평화조약을 거부하고 다시 전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워터루 전투이다. 나폴레옹의 재집권 소식을 들은 유럽 각국은 동맹군을 결집, 연합군이 함께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곳에 있는 영국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을 향해 진격했다.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양군이 합류하기 전에 프랑스는 공격을 개시하고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 프로이센군의 패전 소식을 들은 영국 연합군은 워터루로 후퇴한다.

 

워터루 전투가 있기 하루 전날 비가 엄청 많이 내렸고 폭우로 질퍽해진 땅으로 인해 포병대의 기동력이 떨어지니 공격시간을 미루게 되었고 늦은 출격으로 인해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이 영국 연합군에 합류하면서 나폴레옹 군대는 수세에 몰리게 되고 어떤 장군의 실수로 나폴레옹의 기병대가 거의 전멸하게 되면서 결국 나폴레옹 군대는 워터루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헬레나 섬 유배

그리고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나폴레옹은 이미 한번 유배를 갔다가 탈출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말 먼 곳 아프리카 남쪽의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를 보낸다.  이곳은 가장 가까운 육지가 1200KM나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오갈 데 없는 유배 생활을 하던 중 과거의 영광을 담은 회고록을 작정하게 되고 이 회고록 때문에 나폴레옹과 관련된 신화가 탄생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고국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던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 유언
나폴레옹 유언

 

고국으로 돌아온 나폴레옹
고국으로 돌아온 나폴레옹

[15회 4]

 

나폴레옹 이야기[간략버전]↓

 

나폴레옹 이야기 ( 레미제라블 뜻과 역사배경)

[선녀들 5회 중 일부] 오늘의 탐사지: 프랑스 주제: 프랑스혁명 그후 * 참고 자료 : 유튜브 조승연의 탐구생활/네이버 지식백과/위키피디.. 프랑스 혁명 그 후 이야기 좌파 우파의 탄생 배경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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