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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나폴레옹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쿠데타, 마렝고 전투까지 시간순 정리)

by 365 ^^ 20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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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이다. 나폴레옹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전쟁영웅에서 최고 권력자 스스로 황제가 된 후 몰락까지 영웅에서 독재자까지 흑백 명암이 너무도 뚜렷이 모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시골촌뜨기 소년에서 국민적 영웅이 될수있었던 걸일까? 

 

프랑스는 나폴레옹 통치기간 동안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프랑스 영향권아래 뒀다. (보라색(

 

 

나폴레옹의 어린시절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전 제노바 공국의 영토였던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섬은 1768년 프랑스의 침공으로 프랑스령이 된다. 나폴레옹의 어린시절은 그저 평범했다. 프랑스 사관학교에 10살에 입학한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억양으로 프랑스어를 구사한다는 이유로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며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낸다. 힘든 사관학교 생활 속에서 나폴레옹은 강해진 군인으로서의 출세 의지가 있었고 착실하게 군인이 되는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파리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한다.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섬 위치

 

 

나폴레옹은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혁명에 걸림돌이되는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혁명은 성공했지만 프랑스에는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 위협을 느꼈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오스트리아 영국 에스파냐 등 몇개의 나라)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압박하며 혁명이 유럽에 퍼지는 걸 막으려 했다.

툴롱(프랑스가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 요충지)

1793년에 프랑스 남부 툴롱을 왕당파가 장악해버린다. 완벽한 방어선을 위해 적이었던 영국군에게 왕당파는 도움을 요청해 영국군이 툴롱왕을 지켜고 있었다. 

 

왕당파: 프랑스 혁명에 반대 왕권 복귀를 지지하는 세력

혁명정부: 왕권을 폐지 국민이 국가의 주인

 

 

나폴레오의 성공적 첫 승리 툴롱전투 

톨롱은 루이 12세에 의해 군사 방어 목적으로 요새화된 항구도시였다. 당시 7m 두께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프랑스 주요 해군기지였다. 툴롱 탈환작전을 펼치고 이때 툴롱탈환작전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것이 나폴레옹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 후 처음 포병장교로 툴롱에 배치되었는데 상황은 좋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툴롱항이 내려다 보이는 에기예트 요새를 차지하여 영국군을 몰아낸다. 나폴레옹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포병 대위에서 준장으로 고속 승진하게 된다. 

 

왕당파 반란을 진압으로 승승장구

그러나 이후에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고 정치적 변동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나폴레옹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1795년 10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혁명에 저항하는 왕당파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나폴레옹이 이 반란을 진압에 나선다. 나폴레옹의 작전은 파리시내에서 포격을 통해 왕당파 반란을 진압하려 한다. 파리 생로슈 성당 앞에 총포진을 치고 전투를 벌이게 되고 왕당파 반란을 진압되어 지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공로를 인정받아 26살의 나이에 준장에서 사단장으로 승진하고 또한 지휘권도 얻게 된다. 

 

 

 

이탈리아 원정 후 인기 급상승

이렇게 군인으로 승승장구하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프랑스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오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사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에 있었고 프랑스에게는 늘 골칫거리였던 지역이었는데 이탈리아 북부를 먼저 공격해 그곳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툴롱 전투 이후 군인으로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당시 이탈리아 원정군은 아무런 성과 없이 원정 4년 동안 사기가 하락한 상황이었고 병력도 부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임관 후 북부 이탈리아를 넘어 로디 전투, 카스틸리오네 전투, 아르콜 다리 전투, 리볼리 전투 치르며 혁명의 최대 적이었던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라인강까지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국민 영웅으로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 후 또다른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이탈리아 원정 승리 후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나폴레옹은 영국 공격을 위한 사령관으로 임명이 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육지전에는 강했으나 해상전에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그 대신 이집트 원정을 제안한다. 당시 총재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을 경계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을 승리 가능성이 없는 먼 곳으로 보내려고 이집트 원정을 수락한다.

 

*프랑스 총재 정부 

500인 위원회가 만든 명단에서 원로원이 지명하는 5인 총재로 구성된 총재정부

 

이집트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를 점령하며 승리가 보이는듯 했으나 그 사이에 영국군 넬슨 제독의 등장으로 이집트쪽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함대를 괴멸시켜버렸다.  결국 영국 해군에 의해 나폴레옹 군대는 보급과 퇴로가 끊겨 이집트에 갇히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프랑스 군대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이집트내에서 발생하고 있었고 전염병도 돌고있는 상태였다. 

 

 

쿠데타 제안 받은 나폴레옹

같은 시기 프랑스내에서는 정치 상황이 심상치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총재정부의 무능력으로 부정부패와 파벌싸움으로 국내는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군대를 남겨두고 소수의 부하와 함께 프랑스로 들어온다. 이렇게 국내로 돌아온 나폴레옹을 혼란을 잠재울 전쟁 영웅이 돌아왔다고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이때 나폴레옹에게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쿠데타를 제안한다. 시에예스는 30세의 나폴레옹을 충분히 통제할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나폴레옹은 이 제안을 수락한다. 

 

*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당시 5인 총재 중 한사람으로 대의제의 최고 이론가 중 한명이며 대의제와 시민권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킨 인물로 혁명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무력으로 의회를 제압한후 총재정부를 몰락시키고 나폴레옹 중심으로 3인 체제의 통령정부를 수립한다. 그리고 제1통령에 나폴레옹이 오르게 되고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유리한 의회를 새롭게 결성하기에 이른다 .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가 30세였다. 시에예스는 정권에서 밀려났다.

 

최고 권력  제1통령에 오름

 

마렝고 전투 

나라 안의 쿠데타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나폴레옹은 결국 또다시 전쟁 준비를 한다. 프랑스 군이 주둔해 있던 이탈리아 북부로 오스트리아 군대가 기습공격을 했고 나폴레옹은 직접 원정에 나선다.  이때 이탈리아 마렝고 평야(현재 체코)에 주둔 중이던 나폴레옹 오른팔 마세나 장군의 군대가 오스트리아 군대에 막혀 포위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빠르게 가기 위해 알프스 산맥의 산베르나르 협곡을 넘어서 간다.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 대포는 완전히 분리해서 사람이 끌고 당기며 알프스 산맥을 이틀만에 넘었다. 기동선이 우선이던 병사들은 최소한의 물품만 소지하고 텐트도 없이 움직였고 잠에 담요 한장으로 몸을 덮고 잤다. 이 전략이 오스트리아 군대의 허를 찌르게 되면서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15회 1부]

 

 

 

[15회 2부 계속]

 

나폴레옹이 대중에게 인기있었던 이유? ( 모자, 초상화, 법전)

나폴레옹 초상화 나폴레옹의 자신의 쿠데타를 무마시킬 목적으로 직접 마렝고 전투에 참전했는데 그때의 그림이 있다. 나폴레옹 초상화 중 대중에게 가장 알려진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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