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중위 사건 전말
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 벙커에서 소대장 김훈 중위가 총상으로 사망한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관자놀이 부분에 관통상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오른발에서 50cm 떨어진 곳에서 베레타 권총이 발견되었다. 당시 군의 판단은 김훈 중위가 권총으로 자살했을 것이다. 군에서는 그렇게 발표했다..
자살에 대한 의혹들
이 사건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의문점이 너무 많이 있었다.
▶오른손에 뇌관화약 흔적이 없다.
* 뇌관화약: 총격을 가했을 때 터지는 화약이 발사한 손에 묻게 되는 데 오른손에는 보이지 않았다. 왼손에 화약흔이 발견되었다.
▶ 또한 권총자살시 밀착해서 관자놀이에 쏘면 뇌에 검은 가스 자국이 남게 된다. 그러나 김 중위는 없었다.
▶또 하나는 김 중위의 총 일련번호와 발견된 총이 달랐다.
▶총에는 김훈 중위의 지문이 없다. 김중위의 손목시계에 금이가 있고 그 옆에 크레모아 스위치 박스가 파손되어 있었다. 이것은 몸싸움의 의심 정황이 드는 대목이다.
▶처음 찍은 사진에는 철모 위에 권총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철모가 없어졌다.
▶당시 현장을 장악한 미군수사대로 인해 한국군 수사대는 1시간 뒤에야 도착하고 그마저도 잠시 둘러본 수준이었다.
▶그날 밤 당일에 시신은 깨끗이 닦아져 있었고 현장에 가득했던 혈흔도 세척되었다.
▶무엇보다 김훈 중위의 자살동기였다. 김훈 중위는 아버지도 3성 장군 아버지 아래 육사를 졸업했던 엘리트였다. 그날의 행적도 평범했고 부대원과 라면을 나눠먹고 이야기도 조금 나누다가 정찰을 나가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미국 측 결론
미군 측 자살 동기는 자살을 미화한 소설 <노르웨이 숲>을 읽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내용은 사망 전날 한 병사에게 <노르웨이 숲>이 인간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 넘친다고 했다고 말했다고 한 것으로 비롯된듯하다.
그러나 10개월 뒤 JSA 중사가 북한초소에 30여 차례 방문하여 북한 병사와 긴밀하게 내통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1997년에 출간된 소설 DMZ의 내용과 똑같은 것으로 이것이 나중에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의 원작이다. 유가족의 입장은 바로 이것 때문에 은폐했을 거라 생각한다. 김 중위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 전날 사망했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이 개입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 사건이 점점 커지면서 법의학자 8명을 불러 공개토론을 했으나 7명은 자살, 1명만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타살의 가능성을 검증하는 다양한 실험이 실시되고 3차례에 걸쳐 재수가 거듭되었다. 4차 권총 발사 실험에서는 피실험자 12명 모두 오른손 뇌관화약이 검출되었다. 그러나 결국 자살로 발표된다.
계속된 진상규명 결론
유가족들은 이 결과를 받아들일수 없었고 김훈 중위의 시신을 장례를 10년 이상 치르지 않았다. 초동수사를 너무 잘못했기 때문에 결국 재판에서도 군의 '초동수사 미흡'에 대해 인정되면서 국가 손해배상 판결이 나왔다.
★ 2006년 12월 7일 대법원 판결
초동수사 잘못으로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크레모아 스위치박스나 손목시계의 파손 등을 간과하고
김훈의 사체를 사고 당시와 같이 보존하지도 않고
컴퓨터 등 주요증거품을 확보하지 않았으며
사고 권총이 누구의 권총인지 조차도 조사하지 않아
★ 2009년 11월 2일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이 났다.
★ 2012년 8월 6일 국민권익위원회
'합동발사시험 결과 권총 자살자가 아니다'라며 '순직 여부 재심의 ' 권고
★ 2017년 8월 31일 결국 국방부는
고 김훈 중위에 공식적으로 '순직'을 결정한다.
★ 고 김훈 중위의 유해는 19년만에 현충원으로 옮겨졌고 국가보훈처는 국가유공자증서를 수여했다.
이제 유가족들은 관련자들의 진심어린 사과를 원하고 있다. 김훈 중위 사건 이후 지금은 군에서 사망 사건 시 시신과 현장을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가족과 수사관들이 다 와서 유족과 함께 현장을 보며 일을 처리하는 시스템을 변경되었다. 그 이후에 의문사를 담당하는 여러 기관들도 많이 생겨났다.
[출처 알쓸범잡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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