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년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이 사망 후 2년 뒤에 만주 벌판 한가운데 광개토대왕비를 세워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한다. 18세 정복 전쟁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영토를 넓힌 광개토대왕은 단지의 영토를 넓힌 것만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드러나기 전 조선 전기에 편찬된 <삼국사절요>를 통해 평가된 광개토대왕은 유교적인 관점으로 평가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뚜렷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사료가 적은 이유
광개토대왕 기록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삼국사기 34줄로 단 4면 정도에 불과하다.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면서 그의 업적을 알게 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19세기 말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전에도 비의 존재는 압록강 너머 육안으로 보였지만 그것을 금나라 황제의 비로 추측하고 있었고 그 뒤에 만주지역을 청나라가 봉금(출입금지)을 시키면서 알려지지 않다가 봉금이 19세기 말 해제되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 비문 내용 알아보기
광개토대왕의 묘호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묘효를 줄여서 광개토태왕으로 불렸고, 재위시 한국에서 최초 사용한 연호로써 '영락'을 사용하여 영락대왕으로 불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