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7회]
오늘의 탐사지: 창덕궁 후원
주제: 정조 이야기
정조는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자 조선 제 21대 왕 영조의 손자이며 비극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가진 왕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비극을 극복하고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성군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
창덕궁의 약 60%정도가 후원이다. 조선 시대 당시 울창한 숲이었던 창덕궁 후원은 당시 호랑이 출몰이 잦았었다고 한다.
후원이란?
왕과 왕실 사람들의 휴식처로 신하들과 꽃놀이를 하거나 학문을 연마하거나 과거 시험도 치렀던 공간
부용지
부용지는 숙종때 만들어졌지만 부용지라는 이름은 정조가 지었다. 이곳에서 정조는 과거 급제한 신하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낚시도 했던 연못이다.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천원지방) 전통적 우주관을 반영하여 만든 연못이다.
'수어지교'를 뜻하는 것으로써 잉어는 왕을 상징한다.
1762년 임오년에 발생한 정치적 화변 임오화변이 있었다. 군왕 영조가 자신의 뒤를 이를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이다.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였고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8일이나 방치하니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된다.
고종 때 장조로 추존 된 사도 세자와 혜경궁 홍씨 (경의왕후)의 아들, 정조는 이때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어린 손주의 울부짖음에도 영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사도세자는 결국 27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11세 어린 나이의 정조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웠을 슬픔이었을리라. 사도세자 폐위로 그 자식은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10살 때 죽은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 세자의 양자로 입적 시켜 왕위를 이은 것이다.
정조는 1명의 왕비와 4명의 후궁을 두었고 정실 부인에게는 자녀가 없고 후궁에게서 2남 2녀의 보았다. 드라마 이산에서 한지민이 맡았던 궁녀 출신 후궁이 의빈 성씨를 모델로 한 것이다. 역사 기록에는 의빈 성씨에 대해 짧게 언급되어 있다. 드라마 내용은 픽션이다. 의빈 성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문효 세자는 홍역으로 5세 때 죽고 바로 옹주를 낳았으나 옹주 마저 돌이 되기 전에 사망하여 그 충격으로 의빈 성씨도 죽었다고 한다. 후사를 보기 위해 들인 후궁인 수빈 박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23대 임금 순조가 된다.
사도 세자가 죽은 후 궁에서 쫓겨 났다가 영조의 부름으로 궁에 돌아온 이산(정조)이지만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모두 본 이산이였다. 신하들은 그가 왕이 되면 제 2의 연산군이 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이산의 즉위를 반대했지만 영조는 이를 무시한다. 이에 이산의 즉위를 반대한 세력들은 이산 암살을 계획한다.
궁녀,호위 군관까지 연루된 조직적 암살 시도만 7차례로 정조는 불안한 마음에 잘 때도 옷을 입고 잠을 자고 새벽닭이 울기 전에 잠을 깼다. 단 하루도 깊이 잠들지 못했던 정조는 수많은 잠들이 못한 밤에 학문에 매진했다.
정조는 암살 위협의 위기에 무예를 연마하고 밤에는 학문에 매진하여 문까지 겸비하게 된 왕이 된다.
임오화변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집권층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되자 왕과 신하 간에 대립구도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정조는 온갖 음모와 모함에 시달리며 세손 시절을 보냈지만 복수의 칼을 갈법도 한데 그는 왕이 된 후 오히려 영조의 정통성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 사도세자의 아들" 로 죽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노리며 본인의 정체성도 확립해 갔다. 영조처럼 주도적인 정책 실행으로 왕권강화를 한다.
정조의 왕권강화 정책들
초계문신이란?
(抄啓: 뽑을 초 열 계) -> 인재를 뽑아서 임금에게 보고하는 일을 초계라 한다.
정조가 즉위한 당시 조정은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노론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선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했던 정조는 37세 이하의 재능 있고 젊은 인물들 중 추천을 받아 의정부에서 선발해 유능한 문신들을 규장각에 소속 시켰다. 이런 초계 문신은 직무를 면제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게 하는데 최고의 교수는 바로 정조 대왕 자신이었다.
정조가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시험을 봐 채첨을 하기도 했다. 40세가 되면 졸업 시킨 후 직무를 주어 정치적으로 세력 기반을 확장했다. 이런 초계 문신의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다. 이렇게 규장각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와 관료들을 배출하는 기능을 한 것이 규장각이다.
규장각
규장각이란?
규장각의 정조의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만들었던 역대 왕들의 글을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인 셈이다. 정조가 즉위 하던 해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창건했다. 세종에게 집현전이 있었다면 정조에게는 규장각이 있었다. 왕과 뜻을 함께 할 인재를 모은 규장각을 세워서 새로운 인재를 기르는데 힘썼다.
어수문
어수문은 옆에 있는 작은 문보다 높다. 작은 문은 신하를 위한 것이고 허리를 굽혀서 갈수 밖에 없다. 어수문은 왕을 위한 문이었다.
주합루
1층이 규장각으로 왕실 도서 보관 및 학문 연구실로 사용되었다. 규장의 뜻은 임금이 쓴 시나 글을 뜻하는 규장( 벌규 글 장)
2층은 정조때 정조 자신의 어진을 보관했고 일종의 도서관 도서 열람실로 당시 이곳에 있던 책은 약 3만 권 조선 책 만 여권+청나라 책 2만 여 권으로 시작해 약 10만 권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커진다.
왕이 된 이후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일부 노론 세력 숙청을 실시했다. 그러나 숙청을 최소화하고 탕평책으로 이끌어 나가려 했지만 노론의 입장은 달랐다. 이에 노론들은 정조를 살려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정조 암살 계획을 세운다.
내농포
국왕은 백성들의 직업을 이해해야 성군이 될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창덕궁 내 왕이 직접 농사를 짓던 곳이 있었다. 이것을 재현하기 위해 창덕궁 내 유일하게 짚으로 지붕을 만든 정자 , 청의정 주변에 논을 조성해 놓았다.
왕은 농사를 짓고 왕비는 친잠을 했는데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왕비가 직접 양잠시범을 보여 백성들에게 장려했다. 창덕궁내 뽕나무가 많고 천연기념물 제 471호로 지정된 것도 있다.
영화당 앞 춘당대
문가 시험 중 마지막 3차 시험을 보던 곳이 춘당대이다. 임금은 영화당에 앉아있고 아래에 시험을 보던 사람들이 자리했다.
정조 암살 계획
세손 시절 뿐만 아니라 왕이 된 이후에도 암살 위협에 시달린 정조였다. 정조에게 불만을 품은 남은 적폐 세력 끼리 모여 정조 시해를 도모하는데 노론에서 섭외한 자는 정흥문과 군관 강용휘였다. 이 둘은 개장국집에서 접선 한 후 암살을 도모하고 궁궐로 향한다. 그 당시 정조는 존현각(경희궁에 있음)에 머무르고 있었다. 강용휘의 딸 강월혜가 궁녀였는데 이 사람의 도움으로 자객들과 궁궐에 잠입니다. 군관과 궁녀가 합세하여 정조의 침전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를 봐도 왕의 침전까지 자객이 온 것은 전무후무하다. 국가의 심장이 뚫린 수준의 비상사태였다. 이제 방안으로 쳐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강용휘가 존현각 지붕 위로 올라간다. 지붕 위 기왓장을 깨트리기 시작한다. 기왓장을 던지고 모래를 뿌리기까지 한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이 깬 정조는 결국 강용휘의 소란으로 발각되어 미수로 끝난 암살 계획이었다.
장용영 설치
정조는 이 일로 호위 부대를 확대 시키고 신하들도 반대할 수 없는 최적의 명분 그렇게 설치된 것이 바로 장용영이다. 강력한 군권을 가진 붕당 세력을 견제하게 되었고 장용영에게는 직접 무술을 가르치기까지 한다. 이렇게 규장각, 장용영 모두 정조의 친위 세력을 모아 정조는 왕권 강화를 시작한다.
이렇게 강화된 왕권을 통해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시작했다. 정조의 왕릉 행차 중 밀려드는 백성의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실제로 재위 24년 동안 왕릉 행차 중에 해결한 것만 수천 건에 달하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만으로 3천여 건에 이른다. 이렇게 항상 백성과의 소통에 노력했던 정조였다.
정조의 성격
2009년 공개된 정조가 신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엮어놓은 정조의 어찰첩에 보면 정조의 급한 성격을 볼수 있는데 어찰 속에 뒤죽박죽, 주둥아리, 젖비린내등 거친 단어를 사용했던 흔적이 있어 정조가 마냥 어진 임금만이 아닌 솔직함과 급한 성격이었고 일기를 통해 자신을 생각하고 반성(일성록) 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기도 했던 정조였다.
연경당의 돌문
불로문
연경당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은 사대부 집 형태의 건물이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건물로 19살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는 당시 외척중심의 세력에 맞서고자 궁중연회를 자주 열었다.
순조와 순헌왕후를 위한 연회를 연경당에서 자주 열었다. 왕실의 연회는 단순 잔치가 아닌 왕실의 위험과 권위를 보이는 수단으로 효명세자의 정치적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2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애련지 이름은 숙종때 붙여진 이름으로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가 연꽃을 찬미한 ‘애련설(愛蓮設)’ 에서 가져온 것으로 숙종의 연꽃 사랑을 알수 있다. 또한 정조가 창덕궁 후원 속 아름다운 정경 10경에 대해 지은 시 중에서 제4경 어수당(魚水堂)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며 지은 ‘어수 범주(魚水泛舟)’ 라는 시에 언급된 곳이 이곳 애련지로 추정된다.
물은 따숩고 고기 숨은 물가에 햇살 한가로운데(水暖魚潛渚日悠)붉은 닻줄 거두지 않고 연꽃배 놓았네(不收紅纜放蓮舟)미가의 서화를 산처럼 싣고 다닌다면(米家書畫如山載)넉넉히 봄바람 아래 맘껏 노닐 수 있으리(贏得春風汗漫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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