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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영조 가계도 및 업적 /청계천 유래 / 수표교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5회,36회]

by 짱신나^^ 20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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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5,36회]

 

오늘의 탐사지: 장충단 공원의 수표교

주제: 영조의 업적

출연자: 설민석 , 김강훈, 로운

 

조선 시대 최장기간 재위 왕 영조 

 

재위 기간이 52년인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왕이고 검소한 생활 습관에 채식으로 수명도 82세였다. 우리나라 단군이래 두 번째로 오래 산 왕이 영조였다. 첫 번째 고구려 시대의 최장수 (만 98세)+최장기 재위(79년) 기록한 장수왕인데 장수왕과 영조의 공통점은 후계자는 아들이 아닌 손자였다. 

 

 

영조는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다른 왕들과 달리 성장 환경이 남달랐던 영조는 낮은 신분의 궁녀였던 어머니 숙빈 최씨와 함께 어린 시절 민가에서 살았다. 
 
영조는 왕이 될 거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연잉군의 이복 형 경종이 왕으로 즉위 했으나 당시 병약하고 후사도 없었다. 경종을 지지 했던 소론과 노론이 지지했던 차기 대권 주자는 연잉군 뿐이었고 숙종의 아들 중 마땅한 후계자는 경종과 연잉군뿐이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경종이 곳감과 간장게장을 같이 먹고 설사 증후가 그치지 않아서 혼곤한 상태가 극심해졌다.  그때 연인군이 인삼과 부자(약재)를 처방해 경종에게 줬는데 의관들은 그 재료들이 이 병과 상극이라고 반대했지만 이것을 먹고 얼마 뒤 경종은 승하했다. 이로 인해 영조는 경종 독살설에 휘말리며 평생을 경종 독살설이 꼬리표로 따라 다녔다. 
  
그 후 일단 노론의 지지로 영조는 왕이 된다. 그러나 영조에게는 평생 쫓아다니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영조의 콤플렉스 
 
▶낮은 신분의 어머니 
▶경종을 죽인 살인범 (소론의 입장)
▶노론에 의해 왕좌에 앉은 허수아비 왕
 
영조 입장에서는 허수아비 꼭두각시로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노론을 치기에는 힘도 부족했다.
그래서 영조는 3년을 지켜본다. 3년 동안 노론을 예의 주시하며 힘이 생긴 그때 꼬투리를 잡아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한다. 이것은 아주 좋은 타이밍이였다. 급진파 소론과 난을 준비 중이었던 남인 이인좌는 난의 명분을 소론을 내치는 영조를 타도하자는 명분으로 난을 준비하던 소론이었는데 갑자기 영조가 소론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래서 이인좌는 난의 명분을 잃게 됐지만 뽑은 칼을 휘두른다. 여기 저기 익명으로 쓴 괘서를 붙이기 시작하는데 
 
괘서의 내용은 

 

영조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던 어머니의 출신을 공격, 영조의 정통성을 흠 잡으려 했던 것이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퍼뜨리며 서울로 북상한다.
 
이에 영조는 급진파 소론 이인좌를 진압할 사람으로 (완만한) 소론을 보낸다. 결국 소론에 의해 이인좌의 난은 진압에 성공한다. 소론을 소론으로 잡은 것이다. 
 
영조는 자신을 지지해준 노론 편이지만 그냥 그대로 딸려가면 허수아비가 되니 한번 노론을 내치고 왕위를 굳건히 한 다음 소론을 이용해서 급진파 소론을 제거하고 그 후 노론을 다시 등용하는 뛰어난 정치적 밀당을 보여줬던 영조였다. 
 

영조의 가계도 

 

 

 
영조에게는 두 명의 정실부인이 있었다. 첫 번째 중전인 정성왕후가 66세에 죽고 2년 뒤 15세 어린신부 정순왕후와  결혼한다. 두 명의 정실 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첫 번째 중전인 정성왕후와는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정성왕후와의 첫날 밤에 영조가 중전의 손을 보고 손이 참 곱다고 감탄했는데 정성왕후가 "힘든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이 발언은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여 영조의 무수리 출신 어머니에 대한 컴플렉스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후궁에게 얻은 자식이 2남 12녀로 그 중에 5명의 딸은 어려서 죽고 7명의 딸은 결혼하여 영조는 사위를 얻었다.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의 첫 번째 아들 효장 세자는 1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그 뒤 영조 나이 42세 때 영빈 이씨 사이에서 낳은 두 번째 아들이 사도 세자 '이선' 이다.  
 
영조는 자식에 대한 차별이 특히 심했는데 영빈 이씨에게서 1남 6녀의 딸을 두었는데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를 극도로 미워했다. 그 이유는 화평옹주 이후에 세 딸이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첫 번째 아들 효장세자도 죽게 되어 아들을 간절히 바라는 중에 화협옹주가 태어났기 때문에 화협옹주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화완옹주와 화평옹주는 무척이나 아꼈다고 한다. 
 

영조의 업적 

 
영조는 검소한 생활를 하기로 유명했는데 자신의 버선이 헤지면 직접 꿰메서 신었고, 방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문에 창호지가 떨어지면 직접 발랐다고 한다.
 
가체 금지령
 
조선 시대 유행했던 가체 (가발)가 조선 후기에는 사치품으로 변질되었는데 크고 무거울수록 값어치가 높아져 심지어 소 한 마리 , 집 한 채 값에 이르렇고 이 같은 사치를 막기 위해 영조는 가체를 금지했다. 
 

 

 
가체의 무게가 무려 10kg 넘었다. 영조 때 며느리가 시아버지 들어오시니 고개를 들어 인사하다 목이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보다 못해 가체 대신 족두리를 쓰게 한 것이다.
 

 

 

금주령 시행 

 

영조는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 폐지한 금주령에 반대한 유생과 신하들을 귀향을 보내버렸다. 재위기간 52년 내내 금주령이었다. 금주령을 어기고 매일 밤 술을 마신 윤구연을 확인하기 위해 신하를 보냈는데 다녀온 신하에게서 술 냄새가 나자 이에 분노하여 직접 윤구연의 목을 친다. 
 
장춘단 공원(=장충단 공원) 

 

수표교

 

조선 시대는 농경 국가였으므로 물을 다스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청계천의 유래

(개천->청개천->청계천)
 
농경 국가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치수(물을 다스리다)로 이를 위해 1411년 태종 이방원은 11년 한양의 수로 정비를 시작한다. 한강을 둘러 싼 네 걔의 산에서 흘러온 물이 남산에 막혀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자 개천(수로를 여는) 작업을 실시한다. 
청계천 공사를 새벽 4시~밤 10시 사이에만 일하도록 하며 밤샘 공사를 금지시켰다. 또한 공사장 옆에 임시로 응급치료소도 만들었다.

 

청계천 공사때 처음에는 청계천 다리를 흙으로 만들었지만 비가 많이 와서 큰 돌이 필요했고 이에 태종은 갈등이 있었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에서 병풍석을 뽑아 청계천 석축에 활용했다. 

 

광통교 다리 밑
광통교 다리 밑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에쓴던 병풍석을 뽑아 사용함. 
 
그 후 정비된 개천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오물이 생기고 늘어난 사람 수만큼 개천의 수질도 나빠지기 시작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모여 집을 짓기 위해 벌목을 하여 나무 숫자가 줄어들자 장마 때마다 홍수가 반복됐면서 토사가 쌓여 개천 바닥이 높아지고 비가 오면 개천이 범람하면서 이렇게 매년 악 순환이 반복되어 전염병, 인명 피해의 원인이 된 개천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개천을 맑게 만들자고 한 것이 청개천이다.
 

 

청개천 준천작업

 

이를 위한 작업으로 강바닥을 깊게 파고 긁어내야 했는데 이런 청개천 준천 작업에 필요한 예상 인력이 5만 명 정도 필요했다. 막대한 인력과 재정이 필요했던 작업이었으나 백성들이 자원봉사로 나섰고 나아가 실업 상태에 놓은 백성 6만여 명에게 품삯을 지급하며 빈민구제 역할을 했다. 
 
'경진지평' 글자의 기능
 
또한 영조가 수표교 다리 아래  경진지평이란 네 글자를 새겨 놓았다. 
 
경진지평 네 글자 중 평 자가 흙에 묻히면 다시 토사를 파내어 그렇게 홍수 조절, 수량 측정의 역할까지 한 수표교였다.  
 

 

영조의 역사 바로 잡기 
 
당시 몇몇 중국 역사서에는 조선의 인조반정이 마치 쿠데타로 왜곡되어 기록되어 있었다. 인조 반정이 쿠데타라면 영조의 정통성도 위협 받는 상황이므로 1726년 (영조2년) 왜곡된 인조 반정 정정을 위해 청에 사신을 파견하고 청과의 외교에 성공 쿠데타가 아니라 반정 혁명으로 고치게 했다. 상대적 약소 국인 조선이었기에 더욱 놀라운 영조의 업적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잡기 
영조와 닮은 꼴인 김영삼 대통령도 또한 역사 바로잡기에 앞장 섰던 대통령이다. 
8.15 광복 이후에도 계속 사용해오던 일제의 잔재 국민학교(=황제 국가의 신하 되는 백성의 학교) 이름을 1996년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초등학교로 변경한다. 
 

 

또한 계속된 일본의 망언으로 

경복궁 안에 있던 조선총독부 해체한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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