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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창경궁 속 사도세자의 죽음 (영화 사도의 임오화변 이야기)

by 365 ^^ 2020. 9. 3.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5,36회]

 

오늘의 탐사지:  창경궁 (춘당지-경춘천-문정전)

주제: 창경궁 속 사도세자 이야기

출연자: 설민석 , 김강훈, 로운

 

창경궁 

창경궁

 

일제강점기 당시 창경원이라 불린 창경궁 

 

창경궁을 훼손하고 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조성했던 일제 1
창경궁을 훼손하고 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조성했던 일제 2

 

 

 

1983년까지 유원지로 이용된 창경궁은 1986년 일부 복원되어 공개
창경궁 들어가는 입구에 볼수 있는 회화나무

 

1762년의 비극 임오화변 때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처음부터 지켜본 나무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기이하게 비틀리고 속이 비어버렸다는 설이 있다.

 

창경궁 입구 회화나무

 

임오화변 당시 사도 세자는 28세 정조는 11세였다. 

 


사도세자 '이선' 탄생 

 

두 명의 중전을 맞이 했던 영조는 첫 번째 중전인 정성왕후가 66세에 사망하자 정성왕후가 죽고 2년 뒤, 15세 계비 정순왕후와 결혼한다. 정실부인 둘에게는 자식이 없고 후궁에게 얻은 자식이 2남 12녀였다.


영조의 첫 번째 아들 효장 세자는 1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그 뒤 영조 나이 42세 때 낳은 두 번째 아들이 사도 세자 '이선'이다. 늦은 나이에 맞이한 소중한 아들을 너무도 이뻐서 돌이 되자마자 세자 책봉을 하고 심지어 총명하기까지 했던 사도 세자는 3살에 글자를 깨우쳐 대신들에게 글자를 써 나눠주기도 했을 만큼 영특했다. 

 

 

 


사도세자의 영특함에 대한 일화 


사치할 '치'를 가르치니 그 자리에서 비단옷을 벗었다는 일화가 있다. 

 

사치 할 '치'를 가르치니 그 자리에서 비단 옷을 벗었다는 일화

영조의 기대감도 컸다. 세자 책봉 후 왕세자가 거처하게 되는 곳은 동궁인데 동궁 위치가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 저승전에 지내게 했다.

 

 

그 이유는 그곳은 영조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있는 경종의 부인 선의왕후가 머물던 곳이었다. 심지어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돌보도록 했다. 추측건대 영조의 정치적인 이유가 배경이었을지도 모르나 거리가 멀어진 만큼 자주 보지 못하였고 경종을 모셨던 사도세자의 궁인들이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학문을 게을리하게 하고 놀이에만 빠지게 했고 그로 인해 소론에 우호적인 세자가 되었다. 영조는 세자의 위엄과 정치적 명분 모두를 챙기고자 했으나 부자 관계에 비극을 초래한 셈이다. 

 

춘당지
창경궁 춘당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큰 딸 사도세자의 누나인 화평옹주을 영조는 굉장히 아꼈으나 이상하게 사도세자에게는 엄격했던 영조였다. 어린 사도세자에게 어려운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지 못하자 대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사도세자를 꾸짖기 일쑤였고 그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세자에겐 마음의 상처였다.

 

사도세자의 실제 외모는 실제 실록의 기록은 풍채가좋고 몸집이 컸던 사도세자였으나 엄한 아버지의 책망에 소심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부자 관계가 어긋난 사건은. 

영화 사도 중 유아인 사도세자 역할

15세에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영조가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대신들이 묻는 질문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의견을 물으면 물어본다고 대신들 앞에서 영조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그래서 사도세자가 직접 지시를 내리면 직접 지시를 내린다고 불호령을 쳤었다.

그때부터 사도세자에게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버지 영조가 부른다는 얘기만 들어도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영조가 호통이라도 치면 바로 기절해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버지 앞에선 늘 긴장 상태였던 사도세자였다.  그런 사도세자의 모습이 또 답답했던 영조였다. 

 

 

 

마음의 병을 쌓아두던 사도세자는 장인 홍봉한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저는 본디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오늘은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우울증을 씻어 내는 처방을 잘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보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일이 번잡하니 미안하지만 조용히 보내주십시오
 
-사도세자(18~19세)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장인에게 편지를 보냈던 사도세자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잠시나마 좋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세자의 첫 아들인 '정'이 태어났을 때였다. 손자를 본 영조의 마음은 풀리는 듯했는데 3년 만에 사도세자의 아들 '정'은 세상을 떠나고 영조는 사도세자의 탓을 하고 그 뒤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이산'을 출산하지만 그 때가 영조가 가장 좋아하던 화평옹주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난 이산을 영조가 한동안 싫어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병이 심해진 사건 

그 상황에서 그나마 남은 방패막이는 할머니 인원왕후와 어머니 정성왕후였다. 후궁의 자식인 사도세자였지만 대비와 중전은 사도세자를 아꼈는데 이 두 분이 같은 해 세상을 떠난다. 사도세자가 기댈 곳은 사라져만 갔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밖으로 내보내지를 않았다. 그래서 처음 능행 나온 나이는 22살 때였다. 혜경궁 홍 씨 한중록에는 사도세자의 첫 번째 능행에 몹시 기뻐하고 마음의 병이 다 나은 듯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두 번째 능행은 사도세자를 아끼던 인원왕후 할머니와 정성왕후 어머니의 성묘길이었는데 능행길에 소나기가 내렸다. 

 

송강호 영조 역

이를 사도세자 탓을 하며 영조는 사도세자를 다시 궁으로 돌려보냈다. 

 

 

그날의 기록을 조선왕조 실록 버전은

 

비가 내리니 영조는 '차가운 비가 축축이 젖어서 세자의 몸이 안 좋아질것 같으니 돌아가서 몸을 조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기록된 내용은 

그날 이후로 사도세자의 의대증은 심해졌다고 기록이 있다.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강박증인데 의대증이 심해진 사도세자는 궁녀나 내관이 옷을 입혀주면 옷이 살에 닿는 순간 발작을 일으키면서 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춘전
창경궁 경춘전
햇살이 좋아 봄이 따뜻한 곳 화사한 봄 같은 곳이라는 뜻

 

경춘전은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사이에서 이산 정조(조선 22대왕)가 태어난 곳이다. 또한 <한중록>을 집필한 곳 중 하나로 추정되는 곳이다. 영빈 이씨, 화평옹주 등 왕실의 여인들이 친밀하게 왕래하며 생활했던 곳이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의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경춘전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만 60세 회갑 이후 약 10년 동안 집필한 것으로 궁중생활과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내용에 대해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전적인 회고록이다. 


 
 

실록과는 또 달리 역사적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한중록이다. 

 
사도세자의 살인행각

사도세자가 5개월이 넘도록 왕을 찾아가지 않았다. 원래는 하루에 세 번 왕에게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이것은 큰 일이었고 어느 날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사람을 죽이거나 짐승을 죽여야 쌓인 화가 풀릴 것 같다고 영조에게 고한적도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 

 

기록에는 사도세자는 하루에 6명 정도를 죽이고 세자가 죽인 중관,내인,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처음에는 가정폭력으로 시작됐는데 혜경궁 홍씨는 바둑판 모서리에 눈을 맞는 등의 폭행으로 시작됐으나 처음 살인을 한 것은 대비 인원왕후와 영조 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그 해부터 사도 세자의 살인은 시작된다. 내관의 목을 치고 그 목을 들고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등

 

살인 후 기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도세자였고 살인뿐만 아니라 자결 시도까지 했다.

 
사도세자의 자살시도 

어느 날 여동생 화완옹주와 시간을 보내는데 영조는 함께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왜 사도세자와 같이 있냐고  호통을 치니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도세자는 음독 자살을 시도한다. 

 

두 번째 자살 시도는 영조가 심한 흉년으로 힘든 백성들을 위해 곡식으로 술을 만들지 못하게 금주령을 내린다. 그리고 갑자기 사도세자를 찾아와 다짜고짜 술 왜 먹었냐고 하니 가만히 있던 사도세자는 황당할 뿐이었으나 사도세자는 그냥 인정. 네 마셨습니다. 그 후 억울함과 분노로 발작을 시작 내가 마시지도 않은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왜 가만히 있었냐고 하다가 실수로 촛불을 건드려 큰 화재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또다시 영조에게 꾸지람을 듣다가 억울한 나머지 우물에 몸을 던진다. 

 

 

 

 

 

 

마지막 자살 시도는 할머니의 상중에 만난 인원왕후의 침방 나인 '빙애'에게 반한 사도세자는 나인과 살림을 차리고 인원왕후 상 중에 웃어른을 모시던 나인.... 궁중의 법도를 어긴 사도세자 때문에 분노한 영조는 빙애를 데려오라고 했으나 다른 나인을 빙애인 척 영조에게 보냈는데 발각된다. 영조가 불같이 화를 내자 또 우물에 몸을 던지며 자살시도를 한다. 

 

위의 내용은 모두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고 
조선왕조 실록에는 사도세자의 우물에 자살 시도한 내용을 사도세자가 실수로 우물에 빠졌다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 실록은 과연 진실인가?   
 
문정전
(사도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 문정전
 

사도세자의 비행이 절정을 이룬 날 궁 밖을 좋아했던 사도는 영조 몰래 평양 여행을 한다. 당시 평양은 기생과 향락으로 유명했다. 영조는 이를 알게 되고 사도세자는 궁에 기생을 들이는 것도 모자라 비구니(여승)까지 불러들여 영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나경언의 고변사건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각종 비행을 고변하고 고변 중에는 세자가 반란을 꾀한다는 내용도 있었다.나경언이 고변한 사도의 10가지 비행에 대한 내용은 사도세자의 장인 홍병완이 불태워서 남아있지 않는다. 영조실록과 대천록에는 고변 상황에 대한 기록만 남아 있고 그 내용은 증발했다. 

 

나경언과 대질을 통해 억울함을 풀고 싶었으나 영조는 나경언에게 세자의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을 고변한 죄로 참수형을 선고하며 사도세자에게도 억울함을 풀 기회는 그렇게 사라졌다.이렇게 영조와 사도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고  서로에 대한 불만이 깊어가던 어느 날 사도세자는 해서는 안될 말을 한다. 

 

 

'아모리'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나 누군가를 해치기 전 사용했던 말로 (=내가 처리하고 올게) 그 무시무시한 말을 영조를 향해 내뱉은 것이다. 

역모와 다름없는 말을 입에 담은 사도세자와 이 소식을 접한 혜경궁 홍 씨는 만약 남편이 역모를 일으키고 실패로 돌아간다면 역적의 가족으로 아들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되어 오직 아들만을 위해 아들 걱정이 먼저였던 혜경궁 홍 씨가 이를 시어머니인 영빈 이 씨에게 알렸다. 영빈 이 씨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는 얘기를 듣고 영조에게 말을 한다. 

 
사도의 불손한 언행을 고변한 사람이 사도의 친 어머니(영빈 이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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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기행을 낱낱이 고한 사람은 사도의 어머니였고 이렇게 사도세자는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다. 

부인에게도.. 

친어머니에게도..... 

 

이 말을 들은 영조는 사도 세자를 호출한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마지막 대화 

자신을 찾은 영조의 부름에 죽음을 예감한 사도세자는 꾀병으로 넘어가기 위해 학질에 걸렸다고 하겠다며 아들의 털모자(=휘항)를 가져오게 했으나 혜경궁 홍씨가 아들의 모자는 작으니 사도세자의 모자를 가져다 주겠다고 하자 사도세자 왈  

 

이것이 부인 혜경궁 홍 씨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사도세자는 문정전 앞에서 영조와 마주 선다. 

 
세자가 용포를 벗고 조아리며 절을 했는데 그 안에 무명을 입고 있었다. 어릴 때 무명 옷은 사치가 아니라고 했던 무명 옷인데 평상시에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옷을 

 

 

 

영조는 네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고변을 들었는데 "네가 상복을 입고 있구나" 하며 영조의 의심이 확신되고 어린 시절 아버지를 웃게 한 세자의 무명옷은 완전히 뒤틀린 부자 사이의 죽음을 부르는 비극의 옷이 되었다. 

 
임오화변 그날

 

영조는 세손을 지키기 위한 치밀한 계산을 했으니 왕의 명령으로 죽이면 역적을 처단한 것이 되니 세손 이산은 역적의 아들이 되고 왕이 될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죽으면 아무도 죽인 사람이 없으니 역적의 아들이 아니므로 사도에게 자결을 명한다. 

 

사도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들이고 죽겠다고 자결하고자 했는데 신하들이 달려들어 이를 말렸고

 

이번에는 땅에 머리를 찧는데 신하들이 또다시 막아내고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던 사도

 

이렇게 한 여름에(양력 7월) 계속된 실랑이 속 지쳐간 영조는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한다. 

 

 

뒤주 크기는 160cm 그에게 한없이 작았던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한다. 들어가지 않으니 결국 강제로 사도세자를 가둔 후 자물쇠로 잠근다. 사도세자는 죽을 줄 모르고 '내가 곧 나오리라' 소리치며 나갈 날만 기다렸다고 한다. 이것을 지켜보던 세손 정조가 달려 나와 아비를 살려 달라고 비니  영조는 "나가라" 명한다.

 

 

풍채가 있는 사도세자가 작은 뒤주에 버티다가 튀어나오니 이번에는 사도세자를 다시 뒤주에 가둔 후 영조는 새끼줄로 뒤주를 묶어버린다. 

 

 

그 후 뒤주는 승문원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며칠 동안은 동궁의 관료들이 구멍으로 뒤주 안으로 물과 음식을 주며 사도세자를 챙겼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영조가 그 구멍 막아버린다.

 

뙤약볕 갈증이 극에 달했던 사도세자 

 

세자를 가둔 그날도 영조는 제 시간에 식사를 꼭꼭 씹어 했다고 한다. 계속 뒤주에 가둬 두고 죽을 때까지 다른 궁궐로 가서 지켜보다가 사도세자가 거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처소로 환궁했는데 갈 때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헐)  

개선가- 적을 정벌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연주하는 음악

 

사도세자의 죽음
 

사도세자의 사망은 윤5월20일로 추정되지만 영조는 하루를 더 기다려 뒤주에서 사도세자를 꺼냈다고 한다. 아들의 사망소식을 들은 영조는 일단 뒤주와 멀찍이 떨어져서 흔들어 보라고 말한다. 기척이 없자 뒤주에 구멍을 뚫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재차 확인 후 아들의 죽음이 확실해진 후 들여다 봤다고 한다. 

 
그러나 이 뒤주 이야기는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영조실록에는 간단히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정조실록에는 
"일물(어떤 물건)에 가두었다."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는 
"뒤주에 가두었다."

 

 

훗날 세손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버지의 얼룩진 기록을 지우게 했다. 왕들의 일상을 기록한 <승정원 일기>를  세초(씻어냈다)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쓰지 않았다면 잊혀졌을지도 모를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뒤주에 가두기 전 사도세자를 서인(일반인)으로 강등시켰고 사도세자의 죽은 후 폐위되어  혜경궁 홍씨와 아들은 친정으로 쫓겨난다. 그러나 바로 다시 컴백 후계자로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폐서인의 자식은 왕이 될 수 없으니 손자 이산을 자신의 죽은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이산의 왕위 계승권자의 지위를 유지 시킨 영조였다.

 

영조는 조선시대 성군이였으나 아버지로써는 그렇게 못했다. 그러나 이 또한 영조 입장의 기록이 없는 상태이므로 영조의 진정한 입장과 생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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