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1회]
오늘의 탐사지: 남한산성
주제: 병자호란
출연자: 김강훈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행궁-북문- 삼전 나루터
병자호란 배경
전쟁 이후 명나라는 국력이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명과 후금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그때 세상을 떠난 인열왕후 국상에 명과 후금이 조문을 온다. 그리고 후금은 이때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누르하치에 이어 당시 후금의 2대 칸이 된 홍타이지는 북방을 장악하며 자신감에 차있었다.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에 등극한다.
청나라 황제 즉위식에 참석하게 된 조선 사신들이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자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며 사신들을 돌려보낸다. 이에 선조는 왕위 계승자가 아닌 대역 배우를 보냈으나 발각된다.
이에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인조의 파천
그렇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피신한 이유
병자호란때도 또한 강화도로 피란을 가려했지만 청이 길목을 막아버려 이를 피해 남쪽으로 가던 중 잠시 머물게 된 남한산성이었다.
이곳에서 항전 하려던 계획이 아니라 쉬어갈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게 포위를 당한다.
순식간에 길목을 차단한 청에 의해 강화로도 남쪽으로도 갈 수 없어 남한산성에 고립되게 된 인조였다.
이때 의견이 둘로 나뉜다
주화파(화친을 주장하다) vs 척화파(대의를 지키고 오랑캐와 맞서야 한다.)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 45일간의 기록
병자호란때는 한겨울이었다. 혹독한 추위가 더 공포스러웠다.
1636년 12월 16일 고립 2일째
청나라는 왕의 동생과 의정부 정승들을 인질로 요구하니 대역을 보내고 또 들킨다.
1636년 12월 28일 고립 14일째
성 밖 적의 동태를 살펴보니 적의 북문의 방비가 허술한 것 같아 유일하게 성문을 열고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북문이다.
북문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자리한 북문 (=전승문)
법화골 전투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
1636년 12월 28일 당시 전투의 총책임자 영의정 김류였고 그때 남한산성 안에 (도) 술사가 있었는데 오늘은 "화친과 싸움이 모두 길하다"라고 하여 김류의 명에 따라 북문을 나왔다.
남한산성의 북문 쪽은 비탈이 심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적군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형이다.
청군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주변에 식량과 가축이 있었다.
이때 김류는 계속해서 진군을 명령하고
식량을 거두고 있을 때 청군의 기습으로 조선군 300여명은 몰살을 당한다. 그렇게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기습 작전은 최대의 참패로 기록했고 야사에 따르면 병사들에게 주어진 탄환이 고작 300 발이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에 참전한 네델란드인 박연
박연은 조선으로 귀화를 한 네덜란드 인으로 병자호란 때 네덜란드의 선진 군사 기술을 조선에 전수했던 사람이다.
12월 30일 고립 16일째
까치가 울어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데 다음날 청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왔다. 성밖에는 청나라가 성 안에는 추위와 배고픔으로 점점 숨통을 조여 왔다.
1월 17일 고립 33일째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나올 것을 최후 통첩한다.
1월 22일 고립 38일 째
청 나라 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는데 강화도에는 왕실의 가족들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인조는 사실상 항복을 결심한다.
1월 고립 44일째
12만 청군에게 포위된 그때 홍타이지는 항복 조건을 제시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의 요구사항
정축 화약의
지원군 출정
고립된 인조는 전국 8도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이에 평안병사 유림과 평안감사 홍명구가 출정을 결정하고 남한산성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홍명구, 유림은 위험하니 은밀하게 우회하기로 한다.
강원도 김화에 도착 후 적은 수의 보병으로 구성된 우리 군은 숲에서 게릴라전을 펼쳐야 한다고 산간지대에서 진을 치자는 유림, 청군은 기병 위주라 산에서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홍명구는 평지로 내려가야 적들이 흩어질 것이다. 그래서 홍명구 군은 평지에 주둔 후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한편 유림 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기병대의 기동성을 약화시킨 뒤 고지대에서 대포를 이용해 공격 후 청군을 무찌르고 값진 승리를 거둔 유림 장군이었다.
유림 장군은 화살, 탄환 등이 부족함을 인지하고 지체 없이 이동 해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으로 간다. 그러나 유림 장군이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 인조는 항복을 한다.
결국 1월 30일
45일간의 항전 끝에 항복을 선언하고
항복 의식을 한다.
인조는 곤룡포 대신 푸른 옷을 착복 (낮춤의 의미)하고
묘시(오전 5~7시)에 정문인 남문이 아닌 서문을 통해 나와 항복을 한다.
이렇게 병자호란은 끝이난다. 항복한 인조는 삼전 나루터로 끌려간다.
삼학사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세 학자 홍익한, 윤집, 오달제 인조가 항복한 뒤 청나라고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다.
이 삼학자들은 ...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죽음을 택했던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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