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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조선신분제도와 직업(내시,암행어사,양반,추노)[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8회]

by 짱신나^^ 2020.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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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8회]

오늘의 탐사지: 용인 민속촌
주제: 조선 직업의 세계
출연자: 알베르토 

 

조선 신분 제도 

 

양반+중인+상민= 양인천민(노비)=  천인

 

 

양반 
(조선초기는 시험에 합격한) 문반+무반=양반 (조선중기) 양반 가족과 가문을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


중인
이방, 의관,역관, 율관(법조인)등의 기술직, 서얼(양반 아버지 첩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식)
양반 부 +양인 첩이 낳은 자식은 '서' 자양반 부+ 천민 첩이 낳은 자식을 '얼' 자아버지 양반, 어머니 농민,천민 합쳐서 ->서얼 


상민
피지배층 대다수가 농민, 상인과 수공업자, 신량역천 

 

 

 

신량역천이란?신분상 양민 이지만 천한 역을 담당하는 이들로 뱃사공, 묘지기,어부,목축업자,봉수꾼등이 해당됐다. 
법률상으로 상민과 양반은 같은 권리를 누리는 양인 계급이고 국방,세금의 의무와 더불어 과거시험도 치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천민 
대다수 노비로 구성

차별과 구속을 받은 천민을 천인으로 구분하며 어떤 의무와 권리도 없었다.

 

 


조선의 직업 세계 

 

내시

 

내시의 정의
내시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왕의 수발을 들던 남자로 궁에서 상주하였기에 궁녀들과 부딪힐 일이 많았는데 현실적으로 모든 궁녀가 왕과 인연이 이어질 수 없으니 내시들의 남성성이 살아있으면 사랑에 빠질 가능성 증가하므로 거세를 했다. 


내시 직업도 세습이 된다. 
그러나 내시의 직업도 양자 입양을 통해 세습이 된다. 양자의 조건은 사고로 남성성을 잃은 어린아이들을 양자로 들이는 방법으로 세습이 이루어졌고 그런 아이들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 양자로 들인 어린아이들을 인위적으로 거세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내시의 권력

내시의 힘은 조선 시대보다 고려 시대에 강했다. 고려 시대는 수많은 관직이 내시에서 배출했다.고려 시대에 내시는 왕 옆에서 정무를 수행하는 유능한 관원을 가리켜 부르던 말이다. 삼국사기를 썻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도 내시였다. 고려시대 왕의 수발을 드는 거세 남성은 환관이라 불렀고 적은 수로 허드렛일에만 동원됐다. 


그런데 원 간섭기에 환관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원나라로 갔던 환관들이 황제의 신임을 얻고 고려로 돌아와 권세를 부리게 된다. 환관들의 영향력이 세지면서 원 간섭기에 고려 왕이 내시부를 설치했고 환관들을 다루는 관청인 내시부를 환관들이 관리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조선시대 내시의 권력이 약해진 이유

 

그 이후 조선시대에 관료체계가 변화되면서 고려 시대의 환관이 우리가 아는 조선 시대의 내시로 정착하게 된다. 조선 시대의 내시의 권한이 약해진 것에 이유가 있다. 


고려 말 나라가 부패했을 때 권력을 가졌던 환관들도 같이 부패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은 고려 말 횡포를 부리던 내시들의 권한을 축소하여 조선 시대 내시들의 주로 하던 일이 청소(소제), 문단속(수문), 음식관리(대내감선)등이 되었다. 내시의 권한은 약해졌지만 왕의 총애는 받았었다.  

 

 

 

 

암행어사 

 

조선의 암행 어사 제도는 중앙 집권 체제, 지방 행정 제도의 발전을 상징한다. Why?
고려 시대의 태조 왕건을 지지하던 호족들은 자신이 다스리던 지방에서 강력한 독자권을 행사했고 왕건은 한 명의 사또도 지방으로 파견하지 못했다. 

 

완벽한 지방 분권 사회였던 고려 초기

가 지나고 시간이 흘러 고려 6대왕 성종 시절 처음으로 12목(고려의 지방 행정 단위)에 12목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목사가 파견된 지방보다 목사가 파견되지 않은 지방이 많았고 지방 관리 체계가 미완성 단계였기에 암행어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조선 태종 이방원은 조선 8도의 군,현에 지방관(사또(=수령))을 파견하고 왕이 임명한 지방관인 사또는 담당 지방의 행정권, 군사권,사법권을 행사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사또(=수령)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된 왕의 특명 사신인 암행 어사를 파견했었다. 

 
 
 
 

어사 박문수 

 

조선 후기 문신 박문수는 소론 가문 출신으로 영조 때 많은 업적을 수립했다. 증조부 박장원은 현종 시절 예조판서를 역임하신 분으로 대를 이은 명문가 출신이다. 33살에 과거에 급제한 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영조의 눈에 들게 된다. 

 

당시 영조의 지지세력은 노론이었다. 

 

 

과격파 소론 

이인좌가 난을 일으킨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그 당시 온건파 소론을 이끈 종사관이 박문수였다. 이인좌의 난은 온건파 소론에 의해 9일 만에 꺽이고 영조는 노론도 견제가 가능해졌다. 이렇게 영조의 탕평책에도 힘을 실어 준 박문수였다. 영조의 신임을 얻어 정3품 도승지, 정2품 병조판서, 정2품 호조참판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직언도 서슴없이 영조에게 했다. 양반 군역 제외의 특권에 대한 부당함을 꼬집어 집집마다 군포를 걷는 (호를 기준으로 군포를 징수) 호포제를 주장했다.  100년 뒤 흥선대원군이 이를 시행한다.  이런 파격적인 주장에 영조는 절충안으로 백성의 군포를 반으로 줄이고 왕족과 궁궐에 주어지던 어염세를 국고로 돌리는 균역법을 실시하게 됐다. 왕 앞에서 당당했던 참 관리 박문수였다. 
 
 
 
 
박문수는 암행어사였던 적이 없다?
 
박문수는 암행어사가 아니라 별견어사로 파견됐다. 암행어사는 몰래 신분을 위장 비밀리에 조사를 나가서 지방 관리와 민정을 살피는 직책이고 별건 어사는 신분을 숨기지 않고 주로 기근이 들거나 재해를 입은 지역을 조사하는 등의 일을 했었다. 박문수가 별건어사로 파견된 것도 4차례에 불과하다. 
 
파견 직책에 관계없이 박문수는 백성의 고을을 탐문하고 지방 관리의 실정을 낱낱이 보고 간악한 지방관리들을 벌하는 등 백성들의 편에 서서 백성을 도왔다.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유명해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 중외 일보에 실린 연재 소설 어사 박문수와, 출판 소설<박문수전> 이 나오면서 당시 일제 치하에서 억울하게 짓밝히고 핍박받던 백성들이 자신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길 바라는 간절함이 투영된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가 유명해 진 것이다.

 

 
암행어사의 징표  
 
마패  
 
주요 교통 수단이 말이 던 조선 시대는 전국 곳곳에서 말을 관리,대여해주던 곳을 역참이라고 했다. 역참에서 말을 빌리려면 제시해야 했던 것이 마패이다.
 
마패 앞면/ 빌릴수 있는 말의 수 의미
뒷면/발급연도, 일련번호, 빌릴수 있는 말의 수, 발급기관, 인증 도장으로 구성

신분을 속이고 다니는 암행어사에게 유일한 신분 증명 도구로 분실, 위조 시 큰 벌에 처했다고 한다. 

 

봉서 
왕의 임명장으로 왕이 해당 암행어사를 어떤 지역의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특이한 점은 성문 밖에 나가기 전 개봉할 수 없었다. 

 

 

성문 밖으로 나서야 행선지 파악이 가능했다.한양을 벗어나서 부임지를 확인하라는 뜻으로 집에도 들리면 안됐다. 임무가 누설 돼서 부임지까지 소문이 퍼질까 하여 이런 장치를 만들었으나 그래도 누설이 됐는데 보통 암행어사는 삼정승의 추천에 따라 왕이 임명한다. 


철저히 누설 방지를 하고자 왕은 추천 없이 단독으로 임명하기로 했으나 승정원 직원들이 파견 업무를 주관했기 때문에 정보가 누설되어 사또가 미리 알고 성문을 열어 주지 않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암행어사 존재 자체가 사또 지방 수령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양반 
 
하늘의 별 따기인 과거 시험 합격으로 처음에는 공무원을 지칭하던 양반이라는 말이 후에는 가족과 후손 신분 계층을 지칭하는 말로 변화된다. 조선 시대 후기가 되면서 임진왜란 이후에 국가에서 재정이 부족해 양반을 돈 받고 팔기 시작한다. 돈으로 양반이 된 사람들은 업무를 보는 공무원이 아닌 구색만 갖춘 양반으로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권위가 떨어지게 된다.    
 
양반 일과 
 
1880년 (고종 17년) 선비 윤최식이 저술한 <일용지결>에 나온 "양반 생활 지침서

</일용지결>

온통 독서 ~ 

 
선접꾼, 거벽, 사수 

3년 마다 실시하는 과거 시험은 그 당시 경쟁률이 2000:1 합격 평균 나이는 약 35세 혹은 일흔이 될 때까지도 합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 시험장을 그린 풍속화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A. 조선 후기 정조 때 한양의 인구는 약 20만 명인데 과거 시험장에 모인 인파는 약 11만명이었다. 그러나 실제 제출된 답안지는 약3만8천개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 과거 시험은 문제를 앞에 걸어 놓고 응시지가 문제를 받아 적은 체계였다.


 

따라서 문제와 가까운 앞자리가 인기여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래서 생겨난 직업인 자리를 잡아주는 선접꾼이라는 직업도 있었다. 또한 거벽은 모범 답안을 불러주는 사람이고 거벽의 모범 답안을 다시 깨끗하게 적는 사수도 있었다. 그만큼 조선 후기 과거 시험장에 부정행위가 만연했던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남의 답안지를 들고 도망가는 일도 많았다. 

 
과거 시험장 난장판 분위기는 언제부터?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 (1636)기점으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과거 제도 또한 점점 문라해졌는데 정조가 승하한 후 세도 정치가 시작되며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 때 과거 시험은 폐지되었다.    
 
 
 
추노
도망 간 노비를 다시 잡아왔던 추노꾼, 주로 관의 힘을 빌리거나 자신의 노비들로 도망노비를 붙잡았는데 외거 노비에겐 몸값을 받아내고 솔거 노비는 다시 집으로 붙잡아왔다. 조선 후기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노비도 도망을 많이 가고 신분 탈출이 가능해지는 시기였다. 
 
조선 후기 양반이 될 수 있는 방법들
 

▶양반이 되는 방법 중 하나는 군에서 공을 세워 노비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왜군의 수급을(왜놈의 목)을 가져오면 면천이 가능했다. (노비->양인->양반)


▶두 번째는 나라에 쌀을 바치는 납속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이 제도에 단초를 마련한 외거노비(외부에 거주하는 노비) '임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부자인 재벌노비였다. 임복은 개인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외거 노비로 성종 때 국가 재정이 좋지 않을 때 쌀 2천 석을 기부(현재 가지로 약 8억 원 정도)했고 이에 감격한 성종이 임복을 면천 시키고자 했는데 면천을 목적으로 기부한 것이라며 조정 대신들이 반대했다. 이에 임복은 1천 석을 더 기부하여 결국 임복과 그 가족들까지 모두 면천이 되었다.   

 

▶세번째길 공명첩을 구입하여 신분 상승하는 방법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가 재정이 궁핍하여 돈을 받고 판매를 시작한 백지 임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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