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8회]
조선 신분 제도
양반+중인+상민= 양인천민(노비)= 천인
양반
(조선초기는 시험에 합격한) 문반+무반=양반 (조선중기) 양반 가족과 가문을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
중인
이방, 의관,역관, 율관(법조인)등의 기술직, 서얼(양반 아버지 첩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식)
양반 부 +양인 첩이 낳은 자식은 '서' 자양반 부+ 천민 첩이 낳은 자식을 '얼' 자아버지 양반, 어머니 농민,천민 합쳐서 ->서얼
상민
피지배층 대다수가 농민, 상인과 수공업자, 신량역천
신량역천이란?신분상 양민 이지만 천한 역을 담당하는 이들로 뱃사공, 묘지기,어부,목축업자,봉수꾼등이 해당됐다.
※ 법률상으로 상민과 양반은 같은 권리를 누리는 양인 계급이고 국방,세금의 의무와 더불어 과거시험도 치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천민
대다수 노비로 구성
조선의 직업 세계
내시
내시의 정의
내시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왕의 수발을 들던 남자로 궁에서 상주하였기에 궁녀들과 부딪힐 일이 많았는데 현실적으로 모든 궁녀가 왕과 인연이 이어질 수 없으니 내시들의 남성성이 살아있으면 사랑에 빠질 가능성 증가하므로 거세를 했다.
내시 직업도 세습이 된다.
그러나 내시의 직업도 양자 입양을 통해 세습이 된다. 양자의 조건은 사고로 남성성을 잃은 어린아이들을 양자로 들이는 방법으로 세습이 이루어졌고 그런 아이들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 양자로 들인 어린아이들을 인위적으로 거세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내시의 권력
내시의 힘은 조선 시대보다 고려 시대에 강했다. 고려 시대는 수많은 관직이 내시에서 배출했다.고려 시대에 내시는 왕 옆에서 정무를 수행하는 유능한 관원을 가리켜 부르던 말이다. 삼국사기를 썻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도 내시였다. 고려시대 왕의 수발을 드는 거세 남성은 환관이라 불렀고 적은 수로 허드렛일에만 동원됐다.
그런데 원 간섭기에 환관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원나라로 갔던 환관들이 황제의 신임을 얻고 고려로 돌아와 권세를 부리게 된다. 환관들의 영향력이 세지면서 원 간섭기에 고려 왕이 내시부를 설치했고 환관들을 다루는 관청인 내시부를 환관들이 관리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조선시대 내시의 권력이 약해진 이유
그 이후 조선시대에 관료체계가 변화되면서 고려 시대의 환관이 우리가 아는 조선 시대의 내시로 정착하게 된다. 조선 시대의 내시의 권한이 약해진 것에 이유가 있다.
고려 말 나라가 부패했을 때 권력을 가졌던 환관들도 같이 부패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은 고려 말 횡포를 부리던 내시들의 권한을 축소하여 조선 시대 내시들의 주로 하던 일이 청소(소제), 문단속(수문), 음식관리(대내감선)등이 되었다. 내시의 권한은 약해졌지만 왕의 총애는 받았었다.
암행어사
조선의 암행 어사 제도는 중앙 집권 체제, 지방 행정 제도의 발전을 상징한다. Why?
고려 시대의 태조 왕건을 지지하던 호족들은 자신이 다스리던 지방에서 강력한 독자권을 행사했고 왕건은 한 명의 사또도 지방으로 파견하지 못했다.
완벽한 지방 분권 사회였던 고려 초기
가 지나고 시간이 흘러 고려 6대왕 성종 시절 처음으로 12목(고려의 지방 행정 단위)에 12목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목사가 파견된 지방보다 목사가 파견되지 않은 지방이 많았고 지방 관리 체계가 미완성 단계였기에 암행어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조선 태종 이방원은 조선 8도의 군,현에 지방관(사또(=수령))을 파견하고 왕이 임명한 지방관인 사또는 담당 지방의 행정권, 군사권,사법권을 행사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사또(=수령)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된 왕의 특명 사신인 암행 어사를 파견했었다.
어사 박문수
조선 후기 문신 박문수는 소론 가문 출신으로 영조 때 많은 업적을 수립했다. 증조부 박장원은 현종 시절 예조판서를 역임하신 분으로 대를 이은 명문가 출신이다. 33살에 과거에 급제한 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영조의 눈에 들게 된다.
당시 영조의 지지세력은 노론이었다.
과격파 소론
이인좌가 난을 일으킨다.
신분을 속이고 다니는 암행어사에게 유일한 신분 증명 도구로 분실, 위조 시 큰 벌에 처했다고 한다.
봉서
왕의 임명장으로 왕이 해당 암행어사를 어떤 지역의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특이한 점은 성문 밖에 나가기 전 개봉할 수 없었다.
성문 밖으로 나서야 행선지 파악이 가능했다.한양을 벗어나서 부임지를 확인하라는 뜻으로 집에도 들리면 안됐다. 임무가 누설 돼서 부임지까지 소문이 퍼질까 하여 이런 장치를 만들었으나 그래도 누설이 됐는데 보통 암행어사는 삼정승의 추천에 따라 왕이 임명한다.
철저히 누설 방지를 하고자 왕은 추천 없이 단독으로 임명하기로 했으나 승정원 직원들이 파견 업무를 주관했기 때문에 정보가 누설되어 사또가 미리 알고 성문을 열어 주지 않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암행어사 존재 자체가 사또 지방 수령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양반
</일용지결>
온통 독서 ~
선접꾼, 거벽, 사수
3년 마다 실시하는 과거 시험은 그 당시 경쟁률이 2000:1 합격 평균 나이는 약 35세 혹은 일흔이 될 때까지도 합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 시험장을 그린 풍속화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A. 조선 후기 정조 때 한양의 인구는 약 20만 명인데 과거 시험장에 모인 인파는 약 11만명이었다. 그러나 실제 제출된 답안지는 약3만8천개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 과거 시험은 문제를 앞에 걸어 놓고 응시지가 문제를 받아 적은 체계였다.
따라서 문제와 가까운 앞자리가 인기여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래서 생겨난 직업인 자리를 잡아주는 선접꾼이라는 직업도 있었다. 또한 거벽은 모범 답안을 불러주는 사람이고 거벽의 모범 답안을 다시 깨끗하게 적는 사수도 있었다. 그만큼 조선 후기 과거 시험장에 부정행위가 만연했던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남의 답안지를 들고 도망가는 일도 많았다.
추노
▶양반이 되는 방법 중 하나는 군에서 공을 세워 노비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왜군의 수급을(왜놈의 목)을 가져오면 면천이 가능했다. (노비->양인->양반)
▶두 번째는 나라에 쌀을 바치는 납속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이 제도에 단초를 마련한 외거노비(외부에 거주하는 노비) '임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부자인 재벌노비였다. 임복은 개인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외거 노비로 성종 때 국가 재정이 좋지 않을 때 쌀 2천 석을 기부(현재 가지로 약 8억 원 정도)했고 이에 감격한 성종이 임복을 면천 시키고자 했는데 면천을 목적으로 기부한 것이라며 조정 대신들이 반대했다. 이에 임복은 1천 석을 더 기부하여 결국 임복과 그 가족들까지 모두 면천이 되었다.
▶세번째길 공명첩을 구입하여 신분 상승하는 방법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가 재정이 궁핍하여 돈을 받고 판매를 시작한 백지 임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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