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역사 속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로 태종 이방원이 다섯명 안에는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 외척을 모두 제거한다.
이방원(킬방원)의 살생부 리스트
1392년 정몽주를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1차 왕자의 난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비롯 정도전을 제거한다.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외척을 제거하기 시작 이방원의 아내 원경왕후 민씨의 형제들인 민무구,민무질, 민무휼,민무회까지 모두 죽인다. 태종의 정적 제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나서도 살인을 이어간다. 세종의 장인어른 심온, 심정등 아들 세종의 처가 식구들까지 모두 죽였다.
정몽주 제거
정몽주는 조선을 개국하기 위한 걸림돌이었다. 아버지 이성계를 대신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직접 제거하며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
정도전, 방석,방번 제거
그후 조선이 건국되고 자신이 아닌 자신의 막내동생 방석에게 세자 책봉이 돌아가자 충격을 받는다. 이때 방석을 지원한 사람이 정도전으로 정도전이 신덕왕후의 편에 선 이유는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나라를 원했기 때문에 세자가 약할수록 재상의 힘이 커진다는 것을 알고 신덕왕후의 막내아들을 지원했다.
이에 이방원이 방석의 세자 책봉을 계기로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의 표적인 정도전, 이복형제 방석를 죽였으나 본인이 왕이 되지는 않는다. 이때 이방원은 아버지가 지키지 못한 적장자 우선 원칙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둘째 아들 방과(첫째 아들 방우는 이미 사망)가 제2대 정종이 된다. 그러나 또다른 형제간의 왕위 쟁탈 싸움은 2차왕자의 난으로 이어지지만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에서는 형제를 쫓아만 냈다. 이후 정종은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원경왕후 민씨 외척 제거
태조 이성계가 병이나서 모든 형제가 모여있을때 이방원이 궁궐을 나와 난을 일으킬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인물이 원경왕후 민씨와 민씨의 형제였다. 이밖에도 원경왕후는 이방원이 왕이 되도록 만드는데 제일 큰 조력자였음에도 민씨의 형제를 모두 죽임으로써 외척세력을 제거했다.
민무구, 민무질은 1차 왕자의 난때 이방원과 함께 했던 동지들인데 이들을 유배 보낸 후 자결을 명령한다. 죄목은 이방원이 아들 양녕에게 양위한다고 했을때 그 옆에서 민무구, 민무질이 웃었다는 이유였다.
↓원경왕후 민씨가 태종의 조력자 역할을 이렇게 까지 했는데 ... [자세히보기]
심온. 심정 제거
심온은 세종의 장인 어른이고 벼슬이 영의정이였는데 중국 사신으로 떠날때 백성들이 환호했다고 하여 심온을 강상인의 옥사사건에 연류시켜 제거한다. 아들 세종의 왕권강화를 위해 아들의 외척을 직접 제거, 소헌왕후 심씨는 자신이 왕비가 되자마자 아버지 처형, 어머니도 노비가 되었으니 그 마음이... 태종은 이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강상인의 옥사(1418년)
병조참판 강상인이 태종에게 병조의 일을 보고하지 않을 것을 계기로 그 일파가 처단된 사건
이방원의 개인 성향의 문제였나?
외척과 공신의 죽음은 왕조시대 모든 역사에서 일어난 일로 태종의 성격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원경왕후 민씨 세력은 공신세력이자 고려의 구세력을 대표세력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구시대의 권력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병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태종 이방원 왕의 입장에서는 처음에 병권은 가장 믿는 사람에게 병권을 맡기되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인 것이다. 처남들이 계속해서 세력 확대를 하고 세자 양녕을 중심으로 이들이 결집하면 이씨 왕실의 장래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기 때문에 제거해야 되는 대상이었다.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건국 초기에 모두 일어났던 일이다. 건국 이후 왕권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보통의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태종은 아버지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를 통해 '외척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수도 있겠다' 는 것을 직접 확인했고 자신의 부인 민씨는 사실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보다 훨씬 똑똑하고 집안도 좋아 태종 입장에서 외척에 대한 트라우마가 컸을 것이고 외척을 정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문제가 될것을 판단했을 것이다.
건국할때는 자기편이 많을수록 유리하지만 나라를 만들고 나면 정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외척과 공신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태종이 개국공신과 외척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외척은 기본적으로 혼인을 통해 왕실을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지만 너무 커진 외척은 왕권까지 위협할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외척은 양날의 칼과 같은 권력구조이다.
그렇다면 민씨 집안은 역사 속 외척의 최후를 몰랐을까?
실제로 아버지 민제가 아들들에게 이런 경고를 한 기록이 있다. 우리가문이 너무 성하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라고 아들들에게 경고하며 자중자해할 것을 당부하지만 아들들은 그말을 듣기를 않았다. 이것이 권력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때가 되면 권력을 놔줘야 하는데 권력의 공백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붙들고 있다보면 그 뒤에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이방원은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은것 같다. 정몽주를 죽였으나 그의 자손들은 모두 복권시켰다. 1401년 정몽주는 영의정으로 추증되기까지했다.
또한 태종 이방원은 새와 인연이 컸다. 매사냥을 좋아했던 태종이였지만 태종은 부엉이 소리를 무서워 했는데 이 당시 신덕왕후 강씨의 원혼이 부엉이로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부엉이가 어미를 잡아먹는 새라고 해서 불효조라고 불렀는데 태종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1411년에는 부엉이가 창덕궁 서쪽 모퉁이에서 우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후에 원경왕후 폐출을 논할때도 폐위시키지 않았으며 말년에 원경왕후에게 용서를 구했다. 또한 원경왕후가 병으로 누워있을때도 매일매일 왕비를 찾아갔고 원경왕후가 죽고나서는 고기를 끊고 30일동안 흰옷을 입고 소찬만하다가 원경왕후 사망 2년 뒤 같이 세상을 떠났다.
태종와 원경왕후는 합장릉으로 헌릉을 만들었다. 현재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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