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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체르노빌 원전사고 원인 (벌거벗은 세계사 35회)

by 365 ^^ 2022. 2. 26.

체르노빌의 원전

체르노빌 원전은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던 시기에 세워진 원전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전력 공급을 담당한 발전소이다. 체르노빌은 키예프에서 약 100KM 떨어져 있었다. 총 4대의 원자로 중에 1986년 사고가 난 4호기 불과 3년 전에 완공된 새 원자로였고 4호기 원자로말고도 5,6호기가 건설 중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시간은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 경이었다. 4호기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원자로를 덮고 있던 1000T 무게의 쇠로 된 반응로 뚜껑이 파손됐고 폭발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치솟았다.  가장 큰 문제는 원자로 중심부의 노심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으로 원자로 노심안에는 약 200여 톤의 우라늄 핵연료가 있었고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체르노빌 원전 만들어진 이유
 
인류는 20세기 초반에 핵에너지를 이용해 만든 핵폭탄을 무기로 만들게 된다. 1945년 7월 미국에서 개발된 실험용 폭탄 가제트가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에 완전히 성공했고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이 폭발을 보고 깜짝 놀란 사람이 있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핵무기가 세계에 판도를 바꿀 것이라고 예상하고 핵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소련에서도 4년 뒤인 1949년에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핵폭탄 수를 늘려 갔는데 이미 수백개의 핵폭탄을 보유하던 미국을 따라 잡기 위해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인 원자력 발전소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데 성공한다. 1945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오브닌스크 발전소를 가동하게 되고 이 발전소는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자랑이 된다.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제조 원리는 동일하다.  

화력 발전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가성비가 좋아 소련은 1960년대부터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1960~80년대에 수많은 원전을 지어나갔다.    

 


체르노비 원전 사고 원인  

첫번째 무리한 원전 건설 일정

모스크바 상부가 정한 원전의 완공 일자를 맞추기 위해 나중으로 미뤄진 안전검사로 체르노빌 원전은 불안전하게 완공되었다. 이들은 완공일을 맞춰서 국가로 부터 훈장까지 받았으나 이들이 빠뜨린 안전검사가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단초가 되었다. 

두 번째 위험한 RBMK 설계의 원자로 

 

원자로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때 선택한 원자로가 폭발의 두 번째 원인이 된다. 1950년 소련이 독자 개발한 원자로 모델 RBMK 원자로는 뜨거워진 핵연료를 가만히 두면 원자로 폭발의 위험성이 발생하기 때문에 원자로를 식히는 냉각수(핵연료를 식히는데 사용), 제어봉(핵연료 중성자를 없애서 핵반응 속도를 조절), 감속재 흑연(중성자의 반응이 잘 일어나게 맞춰주는 역할)을 사용한다.

 

 

제어봉과 감속재는 핵반응을 조절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약 정전으로 전기가 들어 오지 않으면 핵분열이 계속되어 점점 폭발의 위험성이 커지게 되고 핵분열을 줄여줄 섬세한 제어봉 조작이 어려운 단점이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물을 감속재로 쓰는 나라가 많은데 소련은 감속재로 흑연인 RBMK형 원자로를 사용한 이유는 저농축 우라륨을 사용할 수 있어서 경제적이었고 많은 전력 생산을 위해 크기를 확장하기 쉬운 장점이 있었다. 이렇게 가성비가 뛰어난 RBMK원자로를 늘려나간다. 



세 번째 비밀주의 (소련이 숨긴 것)

 

레닌그라드 원전사고
설계상 위험성을 가진 RBMK원자로를 사용한 결과 소련 곳곳에서 원전사고가 곳곳에 발생했다. 그러나 체르노빌 이전 원전사고는 모두 철저하게 비밀로 감췄다. 특히 심각한 사고는 1975년 레닌그라드 원전 사고였다. 레닌그라드 원전에서 내부의 연료봉이 녹아서 방사능이 외부로 유출되었는데 이것을 비밀에 부쳣다. 

 

우라늄 연료봉 하나가 단순히 파손된 단순 사고라고 발표했다.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설계상의 문제부터 잘못되었으나 소련 정부는 이 사실을 은폐한 것이다.  그리고 레닌그라드 원전 사고가 일어난 다음날 같은 설계의 체르노빌 원전 3,4호기 건설 계획을 승인한다. 

 


무리한 안전 실험 강행
원전 완공 이후 지난 3년간 진행되었던 실험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 상황이었고 원전 운전자 책임자들은 이번 한번으로 안전 실험을 끝내고자 했다. 이 안전 실험은 정전 상황에서 원자로를 거의 멈춰야 했기 때문에 1달 전부터 날짜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폭발 하루 전날 1986년 4월 25일 금요일 실험을 준비하기 위해 체르노빌 원전  4호기의 기술자들은 원자로의 출력을 정전 상황으로 가정해 절반으로 낮췄고 비상 발전기까지 꺼놓은 상태였다. 이때 전화가 한통 걸려온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전력 담당 공무원이 전화를 걸어 당이 지정한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전력이 필요하다고 항의를 했고 원래 예정 시간보다 하루가 지나 실험 요건에 맞지않게 실험을 강행하게 된다. 

 

 

책임자 및 조작 미숙 직원 실수
원자력 발전소는 밤 12시가 직원의 교대시간으로 4호기 실험 진행하는 담당자들이 갑자기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이 직원들은 실험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력 부족의 신입 직원이었다. 그리고 4월 26일 밤 12시가 넘은 상황에서 안전테스트가 진행이 되고 무리하게 전기 출력을 낮추려는 순간 원자로가 제어 불능상태가 된다. 오랫동안 저출력 상태여서 원자로 상태가 불안전되었거나 젊은 엔지니어의 조작 실수일수 있다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험 책임자 다틀로프는 원자로 내의 제어봉을 대부분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체르노빌 4호기 폭발

원자로 안전 규정상 최소 15개는 꽂힌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실험을 강행하기 위해 무시한 안전 규정으로 인해 원자로는 완전히 통제 불능상태가 되었다. 그의 부하는 위험하다고 실험 중지를 요구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진행한 실험 책임자였다. 결국 실험 책임자는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라고 지시했고 비상 정지 버튼을 누르는 순간 순간적으로 태양 표면의 온도 약 6000 도씨 열이 발생하면서 원자로 안의 물이 단번에 수증기로 바뀌게 되고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해 원자로가 폭발하게 되었다. 

체르노빌 방사능 수치

당시 담당자는 방사능 수치 조차 3.6 뢴트겐 으로 잘못알고 있었다. 소형측정기 최대값이 3.6 뢴트겐이었고 나중에 주변의 파편을 재측정한 결과 시간당 약 1만 뢴트겐으로 사람이 1만 뢴트겐을 1시간 노출되면 즉사한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전에 새롭게 권력을 잡은 고르바쵸프에게 원자로 담당자는 화재는 발생했으나 4호기 원자로는 안전하다고 보고했다. 발전소장 브류하노프가 방사능 수치를 거짓으로 보고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방사능 피폭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은폐, 피해 및 피폭된 사람들. (35-2)

 

체르노빌 원전사고 은폐, 피해 및 피폭된 사람들. (35-2)

체르노빌 원전 방사능 피폭된 사람들 발전소 직원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400배에 해당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다. 원자력 발전소 피폭으로 인해 4호기에서 근무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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