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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청나라 만주족 , 만주어 이야기 / 명나라 멸망 이유

by 365 ^^ 2023. 1. 30.

17c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제국 청나라가 들어선다. 명.청 교체기에 원인을 제공한 주요사건 중의 하나가 1952년 발발했던 임진왜란이다. 명.청의 흥망은 당시 국제적인 돈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을 쩐의 전쟁이라고 할만큼 돈의 역할이 중요했다. 청나라 만주족의 이미지는 오랑캐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과 뗄수 없는 관계이다.  

 

 


만주족 계보

 

만주족의 계보는 말갈족-여진족-만주족으로 이어진다. 발해 또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되어 말갈족이 바로 여진족의 전신이다. 여진족으로 동부 만주 일대에 거주한 통구스 계통의 집단이었고 12세기 초 고려시대때부터 성장한 여진족으로 여진~만주족 활동 지역은 과거 고구려가 지배하던 땅으로 고구려의 민족 구성원도 한반도& 북방의 기마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청에도 구구려의 후예가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주족이다.   

 

 

만주족 언어 

 

외국의 청대사 연구자들이 한국에오면 가장 먼저 가고 싶어하는 곳이 있다.  바로 삼전도비이다. 이 비석이 세워진 지명의 이름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부른다. 삼전도비의 내용은 조선이 오랫동안 죄를 지었고 어쩔수 없이 전쟁을 하여 조선을 정벌할수 밖에 없었다는 정의로운 전쟁으로 포장하는 내용이다.  

이 비석 안에는 같은 내용을 만주어, 몽골어, 한문 3가지 문자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마치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석이 그리스어로 고대 이집트 신성 문자, 민중문자, 그리스 문자 등 세 가지 문자가 새겨지 있어 이를 비교해 신성(상형)문자를 해독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삼전도비
삼전도비
삼전도비 내용
삼전도비 내용



삼전도비는 17세기 초 만주 문자가 몽골문자, 한문과 함께 쓰여있어 초기 만주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만주어는 한국어와 유사한 구조의 어순이다. 만주어는 경상도 방언과 유사하게 들리기도 하다.

 

만주어로 쓰인 삼전도비 내용
만주어로 쓰인 삼전도비 내용
만주어로 쓰인 삼전도비 내용
만주어로 쓰인 삼전도비 내용
만주어로 쓰인 삼전도비 내용
만주어로 쓰인 삼전도비 내용

사돈, 누룩, 안주의 공통점은 만주어로도 사둔(sadun), 누러(nure), 안주(anju)이다.  만주어는 한국어와 발음도 비슷하고 뜻도 비슷하다.  이 만주문자를 만든 사람이 여진족의 누르하치이다. 누르하치는 다양한 부족을 통합하기 위해 만주 문자를 창제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는 만주어를 쓰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중국에 남아있는 만주족이 1000만명 정도인데 그 중에 만주어를 읽고 쓸수 있는 인구는 수백명 정도로 상당히 적고 일상대화로 쓰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만주어는 사멸위기에 있다. 만주족은 우리나라 처럼 말은 있지만 글은 없었다. 그래서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1599년 만주어를 창제한다. 만주어가 중요한 이유는 만주어로 쓰인 수많은 역사적 자료가 많기 때문이다.  

 

 

 

만주어로 쓰인 네르친스크 조약 
특히 만주어로 작성된 문서는 중요한 문서나 외교문서가 많다. 예로 네르친스크 조약 (Treaty of Nerchinsk) 1689년 동시베리아의 네르친스크에서 청과 러시아가 체결한 중국 최초의 근대적 국경확정조약으로 이때 작성된 중국측 문서는 만주어로만 작성되어 있다. 한문이 없다. 

 

만주어로 쓰인 네르친스크 조약
만주어로 쓰인 네르친스크 조약

 

 

명나라의 쇠망  

1592년 조선에 임진왜란이 발발 이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 요청을 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원군 요청에 조선을 의심했고 당시 명나라는 일본의 침입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요동지역 국경지역에 있는 군사 5천 명을 선발대로 파병한다. 그러나 일본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나서 1592년 12월 이여송 부대 4만3천명을 다시 조선에 파병한다.   

이여송 부대는 조선에 오기 전 영하지역에 있던 명에 귀순한 몽골인 보바이가 세력이 커지자 독립을 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가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이었던 것이다.  

 

 

 

 

만력삼대정
이여송 부대는 먼 보급로를 고려해 이때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화폐 은을 가져와서 보급품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보급받으려했다. 그러나 이때 조선은 은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요동, 산동 지역에서 명나라산 보급품을 매입후 조선으로 배송시켰다.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보급로가 굉장히 길어졌고 전쟁 비용도 많이 소비되었다.  명군은 7년간 전쟁비용으로 780만 냥을 소비했고 이는 요즘 현금으로 5조 6천억원을 사용한 셈이었다.   

명나라는 서북쪽에서는 보바이 반란, 동남쪽 임진왜란, 서남쪽 양응룡의 난까지 진압으로 은 200만냥을 탕진하게 된다. 당시 명 조정의 1년 예산은 400만냥이었다. 이렇게 전쟁에 소비한 은만 총 1000만녕이 넘는 비용이었다. 이 모든 사건이 명 황제 만력제 시기에 발생해서 '만력삼대정' 이라 부른다. 

 

만력삼대정
만력삼대정



명이 은으로 인해 명을 다해갈 무렵 청을 일으킨 만주족이 등장한다. 아직 만주이전 여진으로 불리던 시절 각각의 독립부족으로 존재했었다. 명의 여진 관리는 협조적이고 순종적인 부족에게 교역권을 제공하는 상호견제와 충성경쟁을 통해 오랑캐를 통제했었다.   

당시 오랑캐를 쥐락펴락한 인물 이성량은 임진왜란 때 파병 온 명 장수 이여송의 아버지로 이성량에게 순종하며 교역권을 받은 여진족 중 하나가 청을 건국한 누르하치 가문이다. 신하들은 기존에 쓰던 몽골 문자를 사용하자고 반대했으나 누르하치는 뜻을 꺽지 않았고 뿔뿔히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통합하고 만주 문자를 창제했고 결국 1616년 후금을 건립했다. 그 후금은 청나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누르하치가 결국 명을 망하게 한다.  

 

 

 

 

변발 / 치파오 유래 (청나라 문화 이야기)

역사저널 395회 중국하면 떠오르는 많은 부분이 대부분 청나라 문화이다. 변발 기능 만주족은 전쟁이 많았다. 갑옷, 투구 등을 자주 착용했기 때문에 머리 앞부분을 밀고 뒷부분만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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