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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임꺽정 시대적 배경 된 문정왕후 불교중흥정책과 봉은사 이야기

by 365 ^^ 2023. 1. 10.

중종의 세번째 비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렇게 수렴청정 5년 후 1550년 12월 문정왕후는 불교부흥을 추진한다. 

문정왕후 불교중흥 정책

 

승과 제도, 도첩제 실시 

남편 중종이 폐지한 승과를 부활시켰다. 이것은 승려들의 신분을 국가에서 공인해 주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자신이 믿고 따르던 권위 있는 사찰 봉은사에 측근 승려 보우를 주지로 임명한다. 이 측근 승려를 통해 불표 행사를 펼치려는 의도였다. 

 

문정왕후 시기 불교중흥 정책으로 평소 각별했던 보우대사를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고 승려를 대상으로 실제했던 과거 시험 , 승과 시험을 부활, 승려는 인증하는 도첩제를 실시했다. 이때 선종 22명, 교종 11명으로 33명의 승려가 탄생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이는 굉장한 불교역사였다.  이 33명가운데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탄생했고 이들은 임진왜란, 정유왜란에서 승병장이 되어 국가를 위해 싸웠던 승려들이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이때 사대부와 유생들은 끊임없이 반대했다. 불교 보호 선언 이후 육 개월 동안 반대 상소만 500 건 이상이었다. 그러나 요지부동했던 문정왕후였다.

 

 

 

봉은사 이야기

불교 중흥정책의 핵심 사찰이 봉은사였다. 봉은사는 평지에 사찰이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사대문 내 사찰들 조선 숭유억불 정책으로 대부분은 폐사 되었다. 봉은사가 세워진 이유는 왕릉을 보호하고 선왕의 명복을 비는 능침사찰의 역할로 조선의 9대 왕 성종의 능 선릉을 지키기 위해서 지어진 사찰이다. 

 

선정릉, 봉은사 위치



봉은사와 두부
봉은사는 두부와도 관련이 있다. 고려말 두부가 사찰에 전파되기 시작했다가 조선시대는 왕의 수라상에 오르게 되는 궁중음식으로 자리잡았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음식으로 확대되었다. 왕실 제사가 점점 늘어나면서 제수음식이 많이 소비되기 시작하니 제수용 두부를 능침사찰에서 두부를 제조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찰에서 두부를 만드는 일은 아픈 역사가 숨어있다. 봉은사는 불교 종파 중 선종의 대표 사찰이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넘어가면서 능침사찰의 이름은 잃어버리고 불교억압과 더불어 '조포사' 라는 두부 만드는 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종의 대표 사찰 봉은사


임꺽정 시대적 배경

이 당시 문정왕후의 측근들도 부정부패가 심각했는데 윤원형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출세를 위해 윤원형의 눈치를 보고 뇌물을 바친 관료들이 많았다. 또한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정책은 당시 조선의 국가이념에 반하는 정책으로 당시 성균관 유생들이 강력한 반발을 일으킨다. 불교 중흥 반대 상소만 무려523회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종의 동맹 휴학인 권당, 공관도 불사한 성균관 유생들이었다   

 또한 이 정책으로  인해 왕실경비가  늘어나 왕실 경비를 담당하던 내수사에서는 백성들의 땅을 뺏어 경비를 충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문정왕후, 명종때  임꺽정이 등장한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때의 인물로 황해도 , 경기도 일대의 탐관오리를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반만에게 나눠주다가 처형당한 인물이다.  

또한 이 시기 백성들이 너무 살기 힘들어 명종때 ‘구황촬요’라는 소나무껍질, 참께, 대추, 밤등을 먹는 방법 굶주려 부종이 생겼을때 치료하는 방법이 적힌 책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백성들이 힘들어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의 왕릉을 옮기는 천릉을 감행한다. 


 

 

문정왕후는 태릉에 왜 홀로 묻혔나?

[역사저널 392회] 태릉의 상징 중 하나는 태릉선수촌 1966년 6월 국가대표선수의 강화 훈련을 위해 설립된 종합 선수합숙훈련장이 있고 태릉갈비도 유명하다. 또한 문정왕후 단릉인 태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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