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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의빈 성씨 (정조의 유일한 승은후궁 /문효세자의 어머니) 옷소매 붉은 끝동 속 이야기 어디까지 사실인가?

by 365 ^^ 2022. 2. 6.

The Red Sleeve and Jeongjo 

 

 

옷소매 붉은 끝동은 무슨 의미? 
옛날에 드라마 이산에서 의빈 성씨와 정조의 사랑을 다루었는데 이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의빈 성씨와 정조의 로맨스를 다뤘다. 솔직히 배우들이 젊어서 퓨전 사극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제목에서는 상상치도 못했던 정조의 이야기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정조의 로맨스가 그려진 드라마였다.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뜻은 궁궐 안의 궁녀 왕의 여자들 즉 옷소매 끝동부분이 붉은 색으로 궁녀들을 뜻하는 말이다.

 

 

 

 

 

의빈 성씨 (1753~1786) 는 누구? 

의빈 성씨의 진짜 이름은 성덕임으로 세도가의 딸이 아닌 혜경궁 홍씨 집안 청지기(집안일을 봐주는 사람) 성윤우의 딸로 혜경궁 홍씨는 성덕임을 딸처럼 돌봐줬다고 한다. 1762년 10살 무렵(영조38년)에 혜경궁 홍씨의 부름을 받고 궁궐로 입궐하게 된다. 같은해 어린 정조와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렸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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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궁으로 들어온 성덕임은 정조와 한 살 차이로 가깝게 지냈고 기록에 의하면 의빈 성씨는 요리를 잘하고, 바느질에 손이 빨랐으며, 붓글씨에 절로 뛰어났고 정조가 수학문제를 알려주면 잘 이해했고 배움과 이해가 빠르다는 기록으로 봐서 신분이 낮음에도 총명했음을 알수 있다.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 속 성덕임

 

후궁에게 2번이나 거절당한 유일한 왕 정조

시간이 흘러 1766년 세손 시절 성덕임에게 성은을 내리려 하지만 거절한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아직 어리고 출산 가능성이 있는데 성은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한다. 집안 배경이나 후원이 없는 자신이 후궁이 되는 것은 불가능, 또한 정조 곁에 홍국영이 있었기 때문에 의빈 성씨는 신중하고 지혜롭게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정조는 성씨의 의견을 존중하여 물러선다.

 

 

그 후 15년 뒤 화빈 윤씨를 들이고 같은해 다시한번 성덕임에게 성은을 내리려 하지만 또 다시 거절을 당했던 정조이다. 이에 정조는 그녀의 시종을 크게 꾸짖고 벌을 주게 되지만 직접적으로 그녀를 꾸짖지는 않았고 15년의 짝사랑은 마침내 30세가 되어서야 결실을 맺는다.  그래서 정조는 성덕임을 궁녀로써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 정1품 빈으로 올리고 화목하다라는 뜻을 지닌 마땅할 의를 붙여 의빈의 칭호를 내렸다. 

 

 

사실 궁녀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것은 드문일이다.  성덕임의 이름은 최근에 알려졌다. 그전에는 알지 못해 드라마속에서 가명으로 지어졌으나 소설가에 의해 성덕임을 알게 된다.

 

MBC 드라마 이산 때까지만 해도 성덕임 이름을 알지못해 가명 성송연을 사용했다.
그러다 최근에 발견된 의빈 성씨의 필사본이 소설가에 의해 발견되어 의빈글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성덕임이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

 

 

 

의빈 성씨와 정조의 자녀 

 

▷1780년 (정조 29세) 유산

▷1781년 (정조 30세) 유산

▷1782년 (정조 31세) 문효세자 출산

▷1783년(정조 32세) 옹주 출산

▷1784년 (정조 33세) 문효세자 책봉

▷1785년 (정조 34세) 사망 

 

문효세자 

그러나 의빈 성씨는 삶이 순탄치 않았다. 정조의 의빈 성씨가 부부로 지낸 5년 동안 그녀와 정조사이에 태어난 첫째 딸은 태어난지 2개월 만에 사망한다. 또한 1782년 정조 6년 성덕임은 궁인 신분으로 정조에게 아들 문효세자를 안겨준다.

 

예천 용문사에서 발견된 문효세자 태실(이곳에는 연산군 어머니 폐비윤씨 태실도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태항아리와 태지석 보관

정조는 기쁨 마음에 창덕궁에 중희당을 만들어 준다. 문효세자를 생후 3개월만에 원자로 생후 22개월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궁녀 성덕임은 정3품 소용(문효세자 태어난 날)을 거쳐 의빈 성씨(원자 책봉때)로 지위가 상승한다. 1784년 옹주를 낳게 되며 정조와 의빈 성씨는 행복한 나날만 있을 것 같았으나 옹주가 2개월만에 사망하고 그후 문효세자도 1786년 5세에 홍역에 의해 사망한다. 현재 문효세자의 묘는 효창원에 안장되어 있다. 

 

효창원의 문효세자 묘
효장원에 있던 신물을 옮겨왔다.
문효세자 신도비 앞/ 신도비의 글 내용은 어느것이 꿈이고 어느것이 진짜인지 소위 진짜라는 것이 반드시 진짜는 아니고 꿈이라는 것도 반드시 꿈은 아니구나... 아들이 죽은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믿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슬픔을 표현한 글이 있다.

 

의빈 성씨의 죽음

더욱 안타까운 것은 문효세자 사망 6개월 뒤 아들의 뒤를 따라 의빈 성씨도 창덕궁 중희당에서 34세의 젊은나이에 임신 9개월 상태에서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사망하게 된다. 

 


죽기 이틀 전에도 정조가 가면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죽는 날에도 정조는 의빈 성씨의 처소를 찾아갔고 의빈 성씨는 정조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한다. 

 

정조의 슬픔 

의빈의 죽음으로 정조는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되고 의빈 성씨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담아 어제의빈묘지명, 묘표, 치제제문, 비문등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남긴다. 

 

정조가 쓴 어제의빈치제제문 내용 [출처 황현필 한국사 유튜브]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를 같이 묻어주었다. 원래 의빈 성씨는 후궁이기 때문에 문효세자와 같이 묻힐 수 없었으나 정조는 자식과 함께 묻어주면서 그녀의 슬픔을 달래주었다. 의빈의 제사또한 왕을 낳은 후궁에 준하는 제사로 지내주었다. 

 

 

의빈 성씨가 죽은 후 정조는 그녀를 잊었나?

 

의빈 성씨가 죽은후 정조는 20여일간 국정을 돌본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때 나라에 홍역이 돌아 정조는 다시 국정을 돌볼수 밖에 없게 되지만 의빈의 3년상 동안 10번이 넘도록 직접 의빈의 묘를 찾았고 3년상이 끝나고 나서도 의빈의 제사에 쓰이는 공식적인 글은 여전히 직접 작성했다. 글의 내용 또한 의빈을 잊지못하고 있는 절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수빈박씨(정조의 4번째 후궁)가 순조를 낳았을때도 의빈성씨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알렸다고 한다. 

 

 

의빈 성씨 처소는 어디?

드라마 속 정조는 의빈 성씨가 사망한 후 그녀의 처소 중희당을 비워두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역사 기록에는 정조는 의빈 성씨의 처소를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한다. 현재 중희당은 터만 남아있다. 

 

 

                                                              역사 속 의빈 성씨 처소였던 중희당 터 

옷소매 붉은 끝동 속 의빈 성씨 처소로 나오는 곳은 전라남도 보성의 강골마을(광주 이씨의 씨족 마을) 열화정이다. 

 

 

의빈 성씨 무덤 묘

의빈은 죽을때 유언을 한다. 문효세자 가까이에 있고 싶다고 하여 정조는 그 유언을 들어 준다.  문효세자 묘 옆에 의빈 성씨의 묘를 많들어 50m 거리로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의빈의 묘자리도 지금의 효창공원 거둥 고개자리로 정조가 효창원을 찾을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전해지는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현재 의빈 성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경내 후궁묘역으로 이장되어 있다. 이 묘자리는 일제 말기 1944년 일본군이 골프장을 조성하며 효창원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시킨다. 이로 인해 엄마와 아들의 묘사이가 2KM는 더 멀어졌다. 

 

일제는 전국의 후궁묘를 정리하여 고양서삼릉으로 이장했고 이곳에는 왕의 후궁들 16기의 묘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의 묘도 있다.
묘비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의빈은 세자의 어미이지만 스스로 겸손해 거처하는 곳을 소박하게 꾸미고 의복,음식을 꾸미지 않았으며 검약,,검소,절약에 힘썻다. 의빈은 총명한 사람이 일찍 죽게되어 애석하고 그 수명이 길지 못해 슬퍼한다. 라는 내용이 새겨져있다.
정조가 가장 사랑한 여인 의빈성씨를 위해 지은 글이다. 

 

정조의 여자들

 

1. 효의왕후 (왕비 1754~1821)

효의 왕후 김씨는 정조의 왕비로 아버지 청원부원군 김시묵, 어머니 당성부부인 홍씨의 딸로 태어났고 천성이 인자하여 효성스럽고 검소, 효심이 깊고 심성이 고았다. 그녀가 간택된 이유는 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집안 청풍 김씨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효의왕후는 1761년 9세때(영조37년) 삼간택을 거쳐 1762년 10세에 1살 연상 이산과 가례를 올려 세손빈이 되고 1776년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왕세손빈에서 왕비로 등극하게 된다.

 

효의왕후는 사려깊은 성격으로 시고모인 화완옹주의 괴롭힘, 정조와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이간질에도 옹주에게 끝까지 예를 다했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 정조는 나중에 후궁 소생의 문효세자와 순조를 효의왕후에게 입적시킨다. 정조가 승하하고 법적인 아들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왕대비가 되고 이후 순조의 배려를 받으며 노후를 편안히 보내다가 1821년 (순조 21년) 69세의 나이로 창경궁 자경전에서 승하한다. 

 

 

 

2.원빈홍씨(간택후궁) - 홍국영의 여동생

정조의 첫번째 간택 후궁이자 정조 즉위 초기에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홍국영의 여동생이다. 효의왕후가 후사가 없자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해 간택을 명하고 홍국영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여동생을 후궁에 오르게 한다. 원빈 홍씨는 성대한 예식을 치르며 원빈의 작호(왕비가 살아있는데 홍국영의 권세로 '으뜸 원'자를 사용해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와 숙창궁의 궁호를 받고 입궐하였으나 1779년 5월7일 창덕궁에 들어온지 1년도 안되어 14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 여전히 홍국영이 권력의 핵이였기에 원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죽은 후궁에게 원자를 낳은 후궁에게나 하는 성대한 장례식을 하기도 했다.

 

3. 화빈 윤씨(간택후궁 1765~1824)

조선의 두 번째 간택 후궁으로 남원 판관 윤창윤의 딸로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다시 후궁간택을 청하고 삼간택에서 16세의 나이에 최종 간택되어 입궁하게 되고 1781년 화빈 윤씨가 임신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해산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상상임신으로 추정된다.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 속 화빈윤씨와 정조

이후 승은후궁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으면서 정비 효의왕후와 왕세자를 낳은 후궁을 투기하는 행동을 보이면서 거쳐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그녀의 외숙부 조시위가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에게 약을 잘못 올리게 했다는 사실들 독을 썼다는 의혹도 생기면서 외숙부는 유배를 가게 되고 이후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잊혀졌던 그녀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아들인 순조 재위 중인 1824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4.의빈 성씨(승은후궁) -문효세자 출산

문효세자의 생모이다.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는 서로를 아끼며 의빈 성씨는 죽기 전날에도 왕비를 걱정하며 정조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효의왕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고 효의왕후는 의빈이 사망하자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같이 슬퍼했다고 한다. 

 

정조는 2남 2녀였는데 1남 1녀는 의빈 성씨에게서 이후 1남1녀는 수빈 박씨에게서 얻었다.

 

5. 수빈 박씨(간택후궁 1770년~1822년) -순조 출산

의빈 성씨가 죽고 정조에게는 자식도 하나 남지 않았다. 화평옹주의 부마였던 금성위 박명원이 정조를 설득해 네번째 후궁이자 마지막 간택 후궁으로 좌찬성 박준원과 원주 원씨의 딸 수빈 박씨를 후궁으로 들인다. 이때 정조의 나이 36세 수빈 박씨는 18세였다. 수빈 박씨는 세도가의 자식이 아니라 명문가 집안이나 가난한 집안의 딸로 어진 성품과 조신한 행동으로 왕대비 정순왕후, 효의왕후, 혜경궁 홍씨를 잘 모셨다. 

 

1790년(정조 14년) 수빈 박씨는 제 23대 왕 순조를 낳고 3년후 숙선 옹주를 낳았다. 수빈 박씨는 조선시대 유일하게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된걸 지켜본 후궁이다.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된 이후에도 대왕대비, 왕대비, 혜경궁 홍씨에게 변함없이 하루 세 차례 문안 드리는 정성을 보인다. 1822년 (순조 22년) 창덕궁 보경당에서 53세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정조와 효의왕후 묘

 

정조와 효의왕후는 건릉에 합장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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