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 (1748~1781)
홍국영은 정조가 국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정조가 세손이었을 때부터 측근이었고 정조의 반대 세력인 홍인한, 정후겸등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해 정조에게 전달했던 인물이며 정조 초기 4년 동안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다.
풍산 홍씨 집안으로 선조가 아끼던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6대손으로 어머니는 경주 김씨 가문으로 정순왕후와 인척이고 정조와도 12촌간이다. 정조가 그를 발탁한 이유는 정조의 불안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홍국영의 능력외에도 그의 집안이 왕실과 인척관계라는 것도 작용했다고 볼수 있다.
동덕회
세손시절, 정조가 즉위할 수 있게 도와 준 홍국영, 정민시, 서명선 등은 모임을 만들어 정조가 왕이 될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도왔던 인물이다.
홍국영의 외모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심낙수의 은파산고에 묘사된 홍국영의 외모는 용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며 수완이 좋아 임기 응변에도 능했다. 그는 실제로 글에 재치가 있고 예리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홍국영 자신도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다.어릴때 부터 야심이 있어 친구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 라고 자주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홍국영의 권력
홍국영은 영조가 어릴때 부터 정조에게 붙여주었고 그렇게 홍국영은 정조의 오른팔이 되어 정조가 왕이 된 후에는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권력의 중심이 된다.
정조가 권력을 잡아가는 과정 속에서 홍국영은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진정하게 믿고 의지할수 있는 수하였다. 1772년 [영조 48년 ] 25세에 문과에 합격한 홍국영은 정조 즉위 후 승정원 최고위직 도승지(비서실장)로 임명한다. 그해 정조는 첫 숙청을 감행한다. 당시 노론 세력은 대부분 사도세자의 반대 세력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담했던 무리들이었다. 이들(홍인환,정후겸 심환지등) 노론 세력은 정조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정조는 홍국영을 이용해 노론 내에 갈등을 만들고 홍국영은 노론 숙청에 앞장서면서 뿌리 깊은 노론의 권력이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을 숙청했다. 노론의 힘으로 노론을 제거한 것이다. 이후 홍국영은 권력의 핵심이 된다.
도승지에서 홍문관 제학으로 다양한 문서를 처리, 왕의 자문을 담당했고 세금을 관리하는 선혜청 제조로 국가재정까지 관리감독했다. 또한 숙위대장(경호실장)으로 궁궐의 군사를 총괄하며 왕을 호위했었으니 문무관으로 두루 맡으며 나라의 주요 관직을 동시에 맡게 되면서 모든 실권을 거머쥐며 조정의 인사권까지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정조 초기에는 명실상부한 권력의 핵심이었다.
왕위 후계 구도까지 개입
이에 홍국영이 살아남는 방법은 1778년 당시 정조에게 후사가 없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당시 13세였던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원빈 홍씨) 들이지만 원빈 홍씨는 궁에 들어오고 1년 만에 사망한다. 왕의 외척으로서 집권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조선왕조실록 사관의 기록에 보면 원빈 홍씨의 오빠인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해 온 조정이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국영의 최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홍국영이 여동생 원빈 홍씨가 죽자 그 배후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를 근거없이 의심하여 그녀와 대립했고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이 있다. 여동생이 일찍 죽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 소생) 은언군 인의 아들 이담을 원빈의 양자로 들여 정조의 후계자를 만들려했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홍국영이 쫓겨나는 계기가 된다.
그 후 정조의 뜻으로 홍국영은 사직의 형식으로 정조 집권 4년만에 축출된 후 강릉 , 횡성등 이곳저곳을 돌아니다다가 2년 후 강릉에 정착 후 매일 울분과 억울함으로 술을 마시고 통곡하다가 1781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의빈 성씨 (정조의 유일한 승은후궁 /문효세자의 어머니) 옷소매 붉은 끝동 속 이야기 어디까지 사실인가?
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15세 계비 정조와 사이가 좋지 않던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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