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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검은 목요일 주가 폭락 원인, 대공황 속 미국 사회 모습들 2.

by 365 ^^ 2021.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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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유방임주의, 독점 자본주의 탄생 (대공항 이전 상황 보기) 1.

 

[23-2]

검은 목요일 (Black Thursday)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사태 ‘가 발생한다.  유럽에서는 시차로 인해 ‘검은 금요일’이라 부르던 이날은 전날 미국 전력 회사 웨스팅하우스 주가 폭락 후 우량주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뒤숭숭했던 수요일 주식시장은 마감되었다. 주가 폭락 소식에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목요일 주식시장이 개장하자 대규모 주식 매도 사태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갑자기 대량으로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한다.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주식에 투자한 100억 달러가 거의 사라졌다.

 

 

검은 목요일에 거래된 주식은 약 12,890,000 주였고 시카고와 버펄로 증권거래소는 낮 12시 반에 문을 닫아 버린다. 또한 11 명의 주식 투자자가 자살했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당일 오후 1시 월스트리트 주식 중개인들이 긴급회동을 가진다.

 

사태 수습을 위해 여러 회사의 주식을 높은 가격에 매입하자고 합의를 본다. 그러나 이 수습은 실패한다. 이번 상황은 1907년 경제 위기와는 차원이 다른 ‘검은 목요일’ 사태가 되었다. 게다가 주식 시장과 연동되어 있는 미국 경제는 일부 자산가들이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

그리고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의 주식 거래량은 약 1641만 주로 증권거래소 기계도 감당할 수 없었던 엄청난 거래량이었다. 미국 증시는 계속 폭락을 이어갔고 1929년 에서 1932년까지 3년 동안 시가 총액의 90%가 증발해버린다.

 

 

 

'검은 목요일' 사태 원인

 

▶검은 목요일 원인을 찾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역사학 자와 경제학자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과잉 설비, 과잉 생산이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깨고 생산에만 치중했던 것이다. 재고가 쌓이게 되면서 기업들은 주식에 투자를 했다.

 

▶경제 대공황의 두 번째 이유는 주식의 열풍이다.  당시 부실 기업도 주식 상장이 가능했던 시기로 수익을 남긴다는 데이터도 없는데 기업의 주가는 소문으로만 2~3배가 올랐다. 주식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이런 사태를 만들었다.

 

▶또 다른 이유는 고속 성장에 따른 부의 재분배 문제였다. 1920년대 경제호황으로 미국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0.5~1% 상위 계층이 미국 전체 부의 약 1/4을 소유하고 있었다. 미국 가정의 80%는 은행에 예치한 돈이 없을 정도로 부자의 주식을 처분할 때 이것을 받아줄 만한 서민층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식이 폭락하면 회복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경제 대공황 속 사회 모습들

 

경제 대공황 전까지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미국이었기 때문에 미국 경제의 붕괴는 세계 경제의 붕괴를 의미했다.  어떤 나라도 미국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회사의 도산과 자살 및 거리로 나온 실직자들 

주가 대폭락 사태 이후 전국의 수 만개의 회사들이 파산했다. 1929년 부터 1933 년간 약 9000 여개의 미국 은행들이 파산을 했다. 구직을 위해 거리에 나온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경제 대공황 후 약 25% 의 실업률이 발생했고 고층빌딩에서 자살한다는 사람들이 연일 보도되었다. 그만큼 당시 미국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있었다.

 

이 당시 구호 단체들의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 (실업자가 이렇게 많았다.)
경제 대공황 때 구직하던 사람들의 모습. 몸에 본인의 이력서를 걸치고 있던 모습
흥미로운 것은 이 무료 급식소의 주인은 알 카포네였다. 1931년 추수 감사절 때 무려 5000 명이 이용했던 알 카포네 급식소로 어떤이 들은 알 카포네를 ‘대공황의 로빈 후드’라고 까지 불렀다.

판자촌 후버빌 형성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재산을 모두 일은 사람들이 대도시 주변에 판자촌을 형성에서 살았고 이 판자촌의 이름을 후버 빌(Hooverville)이라 불렀다.

 

후버빌이라 부른 이유는 당시 후버 대통령의 무능함을 비판 하는 의도를 담은 이름이었다.  대공황 시기 미국이 노숙자들이 지금 판자촌으로 이곳  거주자들은 수십만명의 달했다.
최악의 경제 대공항 당시 미국인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밀가루 포대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고군분투했던 미국사람들  단지 식재료가 아닌 패션 아이템으로 다양한 패턴과 색감으로 포대를 만들었던 밀가루 회사들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기저귀, 팬티, 가방까지 만들어지고 낡으면 걸래로 그대로 사용할 정도로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슈퍼마켓의 등장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슈퍼마켓이 등장한다. 옛날에는 손님이 주문하면 점원이 가져다 주는 방식이어서 인건비가 높아지니 물건 가격 또한 비쌌기 때문에 경제 대공황 시기에 고객이 직접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저렴해진 물건 가격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슈퍼마켓이었다.

 

 

농산물 가격 폭락

미국의 경제 호황기에도 농민들은 소외되었는데 초기 경제 호황기에는 대량 생산 기류에 맞춰 다작으로 큰 호황을 누렸던 농촌, 특히 1차 세계대전때 큰 호황을 누리다 전쟁 후 수출 판로가 막힌 대규모 농산물은 대공황이 오기 전부터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한다. 헐값이 된 채소와 우유를 길거리에 뿌리며 항의했던 농민들을 정부는 군대를 보내 진압한다. 설상가상으로 경제 공황과 맞물려 참혹한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의 대평원 (great plants) 은 북아메리카의 중앙 로키 산맥의동쪽에 위치한 평원으로 미국의 10개주에 걸쳐 있는 대평원은 현재까지도 미국 농업과 목축업의 중심지이다.

 

대평원의 사막화, 더스트 보울

1930년 초부터 미국의 대평원의 비옥하던 땅이 급속하게 사막화되면서 먼지 폭풍이 솟구친다. 경제 대공항 이후에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난 것이다.

 

 

먼지바람이 생성된 지역을 더스트 보울이라고 하는데 강력한 먼지바람은 한낮에도 칠흑같이 어두웠던 텍사스를 만들었고  먼지의 무게로 지붕이 무너지고 겨울에는 붉은색의 먼지 눈이 내렸다. 텍사스와 오클로호마는 더스트 보울로 피해를 본 면적은 약 1억 에이크 정도로 한반도의 약 2배 크기다.

1935년 기록적인 더스트 보울이 발생하는데 높이가 약 3km였고 바람을 따라 3000km이동 미국 동부 해안까지 도달했던 더스트 보울로 인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도 뿌옇게 보일 정도로 농사를 지을수 없는 저주받은 땅을 만들어버려 농민들에게 지옥같았던 더스트 보울이었다.

 

그렇다면 더스트 보울은 왜 생겼을까?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땅이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무리한 대량 생산으로  휴지기가 없었던 대평원에 척박해진 토질과 기록적인 가뭄과 함께 더스트 보울이 생겼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이주하는 사람들

더스트 보울 피해자는 캘리포니아로 약 250만 명이 이주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1848년에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발견된 ‘금’으로 인해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희망이 땅 캘리포니아로 떠났던 것이다.  1849년에 엄청난 이주를 시작한 사람들

샌프란시스코의 미식축구팀 이름 49ers 로 1849년 이주민들이 성장시킨 도시라는 뜻의 49ers 이다.
아주 유명한 사진으로 이 모습에 당시의 참혹한 상황이 그대로 녹아있는 사진, 일자리를 찾아왔지만 냉혹했던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다. 

이주자들은 저임금에 혹사당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 <분노의 포도>이다.  

더 심해진 빈부격차로 눈앞에 농작물이 넘쳐도 굶는 이주민들의 모습

 

결국엔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게 되니 당시 정치와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공산당 조직이 만연했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23-3] 뉴딜 정책 루스벨트 대통령 경제 대공황 어떻게 극복했나?

 

뉴딜 정책 루즈벨트 대통령 경제 대공항 어떻게 극복했나?

미국 경제 대공황 (1929~1939) 전후 대통령들 →30대 대통령 존 캘빈 쿨리지 (임기: 1923.8.2.~1929.3.4.) →31대 대통령 허버트 클라크 후버 (임기: 1929.3.4.~ 1933. 3.4)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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