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2회]
오늘의 탐사지: 부산 (영도 다리-40계단길-40계단 문화관-비석문화마을-최민식 갤러리)
주제: 6.25 전쟁 중 부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1.4후퇴를 중심으로)
출연자: 육중완
영도 유라리 광장
영도 대교 열리는 영상 1탄에 링크되어 있음
제 1호 만남의 광장이였고 그런 만큼 피란민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는데 이곳에 피란민들의 판잣집 촌이 형성되었었다.점바치는 점쟁이의 경상도 방언
이곳에 점집 골목이 형성되었는데 헤어진 북의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을지 전쟁터로 간 아들은 살아 돌아 올 수 있을까 등등의 불안한 심리와 불확실한 미래가 만들어낸 점바치 골목이다.
만남의 광장이자 영화<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명 장면을 촬영한 장소
11월 부산역 대화재
난로불로 발생한 화재는 14시간 동안이나 계속 됐고 사상자 29명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 현재 가치로 수 천억 원의 피해 액을 낸 대참사였다. 도시 하나를 집어삼킨 화마 이것으로 피란민들이 부산 외곽으로 이전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부산 피란민들의 삶의 애환을 볼 수 있는 공간
피란민 등록증
부산으로 피란 온 피란민들을 파악하기 위한 등록증으로 구호 물품을 받기 위해 필요했던 문서이다.
51년 1월 4일의 옷차림
정부에서 당연히 군수품을 지원해줄 거라 생각하고 행렬에 합류했는데 당시 이들에게 책정된 예산금이 지금 가치로 약200억 원이었다. 그러나 국민 방위군에게는 군수품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겨울의 혹한기에 얇은 옷만 입고 행군하던 국민방위군은 저체온증과 동상에 걸린 사람만 약 20만 명 이상이었고 주먹밥 한덩이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민 방위군에게 책정된 예산은 어디로 갔을까?
1951년에 열린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국회특별 조사위원회가 조사한 결과 당시 국민방위군 장군과 장교들이 당시 돈 현금 23억 원과 쌀5만 2000섬을 착복해서 팔아버렸다. 결국 관련 책임자 5명은 전부 사형당하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과 국방부 장관도 책임을 통감하고 사임을 한다.
혹독한 추위에 행군하다 죽은 예비 병력의 수가 9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장사꾼들이 서로 사려고 다투는 모습을 비유했다는 설
모두 다 땐다 '장사하려고 많은 물건을 사왔다 에서 도떼기라고 불렸다는 설
돗데기시장-자유시장-국제시장으로 변천
국제시장과 양대산맥으로 하나의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깡통시장이 있었다.
6.25 전쟁 이후 미군들의 물자를 취급 통조림을 포함 쇠,철 재질의 군용 물품이 많아 붙여진 이름
6.25 전쟁을 피해 집을 떠나 부산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산역 앞에 판자촌을 만들어 살았었다.
그 당시 아미동의 분위기는 화장장 때문에 연기와 시체타는 냄새가 가득하고 젯밥을 노리는 까치와 까마귀가 바글바글 했던 곳이다. 너무 을씨년스러웠던 아미동이었다. 인적이 드물었던 이곳이다.
그러다 6.25 전쟁으로 수많은 피란민이 발생하고 갈 곳 없던 이들은 길거리와 다리 밑에서 팟잣집을 짓고 살거나 노숙으로 전전하다가 산 동네 아미동으로 오게 된다. 계속 밀려 오던 피란민들이 골칫거리였던 부산 공무원들은 부산역을 전전하는 피란민에게 아미동 주소를 주면서 그곳에 가서 살라고 했다.
그래서 6.25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피란민들은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묘지와 돌벽, 비석을 주춧돌로 삼아 아미동에서 집을 짓고 살았다. 집을 짓고 살다가 바닥을 뜯으면 어느 날 유골함이 나오기도 하고 유골함마저 항아리로 쓰거나 그것을 내다 팔아 생계로 이어졌던 곳이 아미동이다.
마을 곳곳에 있는 묘지 비석들
현재는 근 현대사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마을로 재탄생한 아미동이다.
감천문화마을
비석문화 마을과 감천문화 마을은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이다.
사진작가 최민식 갤러리
1세대 다큐 사진 작가 최민식
전쟁 후 부산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로 해외 원조를 받는데 큰 기여를 하셨던 작가이다.
전쟁 후 부산 시민들의 삶을 담은 사진들,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들, 삶과 인간이 주제였던 최민식 작가의 작품들이다.
작가의 말
가난과 불평등 소외의 현장을 담은 내 사진은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한 나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운명과 대결하며 씨름하고 있는 슬프고 고독한 사람의 얼굴을 전하고 싶었다. 나는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람을 찍었다.
☞인천상륙작전과 포항여중 전투 속 학도의용군 in 용산 전쟁기념관(43)
☞6.25 전쟁 흥남철수 작전과 대한해협 해전 in 부산 유엔평화기념관(22)
☞서울 속 6.25 전쟁 흔적들/한강다리 폭파의 진실/단장의 미아리고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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