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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흥선대원군은 어떻게 고종을 왕위에 올릴 수 있었을까? (흥선 대원군 업적)

by 365 ^^ 2021. 1. 11.

 

[선녀들 리턴즈 55회 중]

 

주제: 흥선군 이하응 흥선대원군 되다. 

 

흥선군 이하응
 
흥선대원군은 원래 왕가와는 먼 친척 관계였다. 정조의 배 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왕족 중에서 은신군의 양자를 찾았는데 은신군의 양자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덕에 이하응(=흥선대원군)은 권력의 중심으로 올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권력의 변방에 있다가 갑자기 권력의 중심으로 오게 된 이하응이었다. 

그러나 헌종~철종 때 안동 김씨의 세력이 컸을 당시 안동 김씨의 말을 안 들을 것 같은 왕족은 역모의 누명을 씌워 처형을 시키던 시기였다. 세도가문 안동 김씨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이하응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였지만 가장 총명했다. 그래서 아버지 남연군은 아들 이하응(=흥선대원군)에게 엘리트 교육을 시키며 올인했고 그렇게 모신 스승이 바로 추사 김정희였다. 
 

 

이하응은 스승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예술가로 유명했으며 명석한 두뇌로 엘리트 정치가가 되기 위한 학문을 쌓고 비범한 리더로써 야망을 품지만 이런 뛰어난 이하응을 지켜보는 안동 김씨의 위력도 대단했기에 대원군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 (=와신상담)
 
그래서 대원군은 파락호인 척 건달 행세를 하고 다닌다. 상갓집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거지 마냥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서 별명이 '상갓집의 개'였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여기저기 천대받으며 비굴하게 얻어먹어 상갓집 개 이하응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이하응(=흥선대원군)은 똑똑하고 왕족이기까지 하니 항상 감시대상 1호였기에 그래서 야심을 숨기고 이렇게 안동 김씨의 견제를 피해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했던 이하응이었다.  

 

이렇게 안동 김씨들의 경계심을 없애고 조용히 기회를 노린 이하응 얘기는 소설에 나온 이야기이다. 김종인 작가가 1933년에 연재한 소설<운현궁의 봄>에 나온 흥선군의 이야기지만

 

(설쌤 생각) 실화를 토대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유는 당시 흥선대원군의 마지막 집권 시기는 1894년이었고 그리고 1933년 약 40년 뒤 일제 강점기에 나온 소설이 <운현궁의 봄>이기 때문에 40년 전의 일은 함부로 부풀릴 수가 없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와신상담하고 용의주도함을 보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25대 왕 철종의 통치 하에 있던 시절에 철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위중 했는데 대를 이을 자식이 없던 철종이 승하하게 되니 왕위 후계자를 결정할 권한은 신정왕후(풍양 조씨)에게 있었다. 
 
신정왕후의 후계자 1순위 조건이 풍양 조씨의 세력을 키워줄 왕이 필요했고 이하응(=흥선대원군)은 이 씨에 정조의 조카 손자 격인 왕실 종친이었으니 왕위 후계자로 조건은 충족이 되었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정왕후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길 원했던 신정왕후에게 이하응 또한 같은 뜻이고 왕위 결정권자인 신정 왕후의 협조가 필요함을 설득 시키기 위해

 

 

철종이 승하 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아들 이명복을 왕위로 추천한다고 하니 정치적 입장이 맞아 떨어지니 둘에게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이하응

대원군 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신정왕후는 철종이 승하하게 되고 왕위 후계자를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조선의 제 26대 왕으로 임명한다. 
 

 

아버지 이하응이 노력 끝에 아들 고종을 왕위에 앉히고 그는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된다. 보통 아버지가 아들한테 왕위를 계승하는데 아버지를 건너뛰고 아들이 왕이 된 특이한 경우 왕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부른다. 
 

 

 

흥선대원군 뜻 

 

우리나라에 대원군은 총 4명이다. 선조,인조,철종, 고종의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생전에 대원군 작위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왕족에게 주는 '군' 호칭을 받아 흥선군 이하응으로 불리다가 아들이 왕이 되어 흥선대원군이 된 것이다. 
 
 
12살의 어린 고종이기에 권력은 수렴 청정으로 신정 왕후가 잡고 있었다. 그러나 실세는 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었고 결국 약 2년 2개월 만에 수렴 청정을 포기하고 흥선대원군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한다. 그리고 대원군의 시대가 열린다. 
 
 
대원군의 업적 
 
통상 수교 거부정책을 실시
세도 정치로 나라 안은 부패해 있었고 밖으로는 병인양요,신미양요 등 서양의 침략이 이어지고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을 막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실시한다. 오늘날 비판을 받기도 하는 정책이나 서양의 침략이 달갑지 않았던 당시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민심을 얻게 된다. 
 
고른 인재등용
고종을 즉위 시킨 흥선대원군의 가장 큰 과제는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는 대표적인 안동 김씨인 외척 세력을 (서인, 노론세력임) 제거하는 것이었다. 고종을 앉혀 놓고 대신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 ▼
 
 
→태산을 깍아서 평지를 만들고는 안동 김씨 세력을 숙청하겠다.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 집권파 서인의 반대세력 남인을 등용하겠다. 
천리 밖에 있는 걸 지척으로 삼으려 하니 ->쫓겨난 왕족들을 불러들여 왕권을 강화하겠다. 
 
비변사 해체
당시 군사, 행정 모두를 담당했었던 외척 세력들의 정치기구였던 비변사를 해체하고 새로이 행정은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가 담당하게 한다. 국가기구 정비를 통해 군권과 행정을 분리 시켜 외척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했다. 
 
 
서원 철폐 
서원은 원래 교육과 제향을 담당했으나 붕당정치 변질의 온상이 되어 버려 주요 47개 소를 제외한 600여 개의 서월을 철폐한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어 버렸던 서원이었다. 
 
 
경복궁 중건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창덕궁을 정궁으로 삼아 왔었는데 경복궁을 중건하고 싶었던 신정왕후는 그 의견에 뜻을 같이 해 무너진 왕실의 기강을 잡으려 했으나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공사비로 자금 충당이 어려워지자 세금을 추가 징수한다.
 
지주들에게 추가로 거둔 결두전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는 통행료 징수 
양반들에게 걷은 강제 기부금인 원납전  
게다가 백성들에게 노역까지 
 
당백전 발행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가장 큰 실수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하는데 재정난 타개를 위해 발행한 고가의 화폐 당백전을 발행한다. 

 

 
당시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인 당백전을 발행하나 명목상의 가치와 실제 유통 가치가 달랐다. 예를 들면 500만 원 짜리 화폐가 발생되었다고 가정하면 이 지폐를 사람들은 5만 원으로 쓰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물가가 오르게 되어 결국 화폐 질서를 크게 어지럽히고 6개월 만에 주조를 중단하게 된다. 
 
 
면암 최익현의 
<계유상소>
 
최익현은 정치적 이익 때문이 아닌 애국심에 의해 바른말을 한 인물로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린다.

 

흥선대원군의 집정(정권을 잡음)이 법도에 어긋나고 경복궁 중건의 폐해가 많음을 지적하며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요청한다. 10년 간 집권한 흥선대원군의 세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인 최익현의 <계유상소>였다.

 

 

고종 지지세력 등장과 최익현의 상소까지 더 이상 집권할 명분이 사라진 흥선대원군은 결국 무소불위의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나게 된다. 흥선 대원군은 이후 양주 직곡산장으로 내려간다. 
 
이렇게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된 여흥 민씨 명성황후 세력 민승호, 민겸호 형제를 고종의 정치적 배후 세력을 기르기 위해 등용했으나 
 

 

명성황후와 고종의 권력을 업고 세도를 부릴 만큼 커진 여흥 민씨로 새롭게 정책들이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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