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개입으로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한 미 해병의 집중적 희생으로 흩어져있던 10군단은 흥남으로 철수가 가능해졌다. 철수하는 유엔군을 뒤따른 9만 8천여 명의 북한주민들 피난민이 흥남부두로 모이게 되고 12월 14일 미 해병 1사단, 미 7사단, 한국군등이 해상 철수를 위해 승선을 시작한다.
군인 가족이나 미군 포함 10만명 정도가 해로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정하려 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피란민들이 몰려왔다.흥남부두로 몰려온 민간인이 10만명 가까이 되었으나 민간인이 군 수송선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국군을 피해 미군을 따라 내려왔던 주민들이었다. 그러나 피란민들까지 태우기엔 선박이 부족했다. 당시 무기와 함께 군인 가족과 미군 10만명 정도는 흥남에서 부산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당시 미군 사령관이었던 에드워드 알모드 장군이 배의 무기를 내리고 피란민을 태워라 명령한다.
이때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무기를 모두 버리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이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군인과 피란민 약 20만 명이 탈출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내린 무기들과 항구는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모두 폭파를 시킨다. 그러나 아직도 그 불바다 뒤에 10만명의 피란민들이 더 있었다고 한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
흥남 철수 당시 가장 많은 피란민을 태운 매러디스 빅토리 호였다. 당시 제한된 승선 인원으로 배에 모두 탈수 없었고 배에 기어오르다 빠져 죽은 사람들, 부모와 자식의 손을 놓치고 울부짖는 사람들, 수많은 가족들이 생이별한 비극적인 현장이었다.
이때를 배경으로 만든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로 흥남 철수를 배경으로 한 노래이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사연이 있었다니
메러디스호에 승선했던 사람들은?
메러디스호가 출발하고 부두를 폭파한 후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그렇게 떠났다.
흥남에서 거제도로 향하는 배 안 피란 도중 배 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있었다. 마침 태어난 시기가 크리스마스였고 힘겨운 피란 중 선물과도 같았던 다섯 아이들이 태어나 이름을 김치 1-5호로 지었다. 이 다섯아이들은 아직도 살아있다.
또한 메러딕스 빅토리호에 승선한 사람 단 한명도 죽지 않고 피난에 성공했다. 이념과 체재보다는 생명과 자유의 중요성을 보여준 흥남 철수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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