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회
1636년 병자년 12월 얼어붙은 압록강을 뚫고 조선을 향해 질풍처럼 내려와 6일만에 서울에 도착한다. 인조는 수구문을 통해 가까스로 도성을 탈출한다. 하지만 순식간에 뒤쫓아 온 청군에 의해 강화도 파천에 실패하고 남한산성에서 고립된다.
오욕의 역사 병자호란
오랑캐라 여긴 청에게 두 달만에 참패를 당했고 심지어 굴욕적인 항복 의식까지 했던 조선역사기에 외교적 실수를 했을때 병자호란 이후 최악의 외교 참사라고 비유할 만큼 오욕의 역사로 치부하고 있고 삼전도비를 심하게 훼손한 사건도 있었고 많은 이들은 요즘도 삼전도비를 왜 세워둬야 하는지 의문이 많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청의전쟁이기도 했다. 병자호란은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홍타이지가 자신의 모든것을 쏟아부은 총력전이었다. 청, 홍타이지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홍타이지에게 병자호란이란?
음력 12월 8일~정월 30일 병자호란은 불과 53일 만에 끝이 났고 조선의 참패였다. 고려 시대 약 30년간 몽골에 맞선 우리 민족이고 임진왜란도 7년간의 전쟁 끝에 승리를 했는데 이런 참패는 말도 안되는 결과였다.
이는 홍타이지의 직도 (말을 달려 곧바로 찌르다) 전략때문이었다. 인조 이전 광해군 대에 이미예상했던 전략이었다. 만 6일 만에 압록강에서 한양에 도달한 것이다. 인조가 순조가 숭례문에 갔는데 청나라 선봉대가 홍제동에 당도했다고 전해졌다. 더 놀라운 사실은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출정을 했다는 것이다. 홍타이지가 적국까지 직접 정보를 온 것은 병자호란이 유일무이하다.
천연두가 무서웠던 홍타이지
조선군의 보급로를 끊어 놓고 느긋하게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 한밤중에 사람을 보내 협상을 위한 사신을 요청했다. 이유는 당시 퍼지고 있던 천연두 때문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전쟁 중 법을 어긴 부하들을 처벌하는데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는데 이를 보고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한 홍타이지는 천연두를 피해 먼저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홍타이지는 아직 천연두에 걸리지 않아 면역력이 없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명과 달리 천연두 치료법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청이다. 청나라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균 , 천연두였는데 홍타이지의 아들 순치제도 24세에 천연두로 사망했고 19세기 후반 총 10대 황제 동치제도 20세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만큼 만주족에게는 천연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천연두로 시간에 쫓기기 시작한 청군은 전쟁의 종결을 서두르기 시작했고 수세에 몰린 조선은 1637년 정월 30일 조선의 임금 선조는 왕의 옷이 아닌 하급 관리의 옷을 입고 남한산성을 나선다. 이윽고 삼궤구고두 의식을 거행한다. 인조의 항복 이후 소현세자는 볼모로 심양에 끌려간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한달 동안 소현세자를 만나지 않는다.
병자호란 이후 승승장구하던 홍타이지는 1634년 불과 51세의 나이로 돌연 사망한다. 사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건강 악화로 인한 사망이었다. 홍타이지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겨우 6살의 나이로 황제가 된다. 청나라 2대 황제 순치제이다. 너무 어린 나이여서 섭정을 맡았던 인물이 도르곤이었다.
▼399회 다음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