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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년 홍타이지가 돌연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순치제가 황제가 된다. 6살의 어린나이였기에 도르곤이 섭정을 하게 되고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뒤를 이어 명나라 정복에 나서게 된다. 1644년 3월 19일 명나라의 심장, 자금성이 불탄다. 가뭄과 기근에 지친 농민 반란군들이 명왕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목을 메 자결을 하고 주인을 잃은 명왕조는 섭정왕 도르곤이 장악했고 새로운 제국 청나라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날 도르곤 옆에서 신제국의 탄생을 목격한 소현세자가 있었다. 명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멸망한다.
인조는 병자호란에 패하며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청은 조선에 항복 이행조건을 제시했는데 그 조건중 하나가 큰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청의 수도 심양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이때 소현세자를 데리고 간 청의 인물이 도르곤이었다.
도르곤은 누구?
이름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은 만주어로 오소리라는 뜻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로 이복형인 홍타이지 아래에서 수십년간 공훈을 세운다. 1612년 2월생으로 소현세자와는 동갑내기였다.
17세부터 몽골과 명 정벌에 출정했던 도르곤은 많은 공을 세웠고 1635년 차하르 몽골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대원전국의 옥새를 획득한 것이다. 이 옥새를 홍타이지에게 바쳐 대원제국 옥새를 통해 원나라를 잇는다는 명분을 획득하면서 후금에서 대청을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청 태종, 도르곤의 이복형 홍타이지가 한에 오르고 나서 어린 도르곤을 견제하기 위해 홍타이지는 도르곤의 생모를 청 태조 누르하치의 묘에 순장시켰다.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던 도르곤을 견제하기 위해 친엄마를 순장시킨 것이다. 이에 살아남기 위해 도르곤은 분노를 누르고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병자호란에도 참여했던 도르곤은 강화도 점령에 일등공신이었다. 인조와 왕족을 포위해서 결국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데 기여한 사람인 것이다.
도르곤 명 정벌에 동행한 소현세자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은 제약이 많았다. 아무나 만날 수 없었고 외출 시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일부 역관, 대신, 황족들만 접촉이 가능했다. 그중에 가장 소현세자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조선에서 사대하던 명 정벌에 동행을 강요했던 것이다.
도르곤, 소현세자 심양 루트
만리장성의 동쪽 끝 (천하제일관) 산해관이 있다. 이곳은 청 도르곤과 조선의 소현세자가 밟은 길이다. 도르곤은 산해관을 넘어 자금성에 입성했던 것이다.
산해관 전투
당시 도르곤은 명군이 지키는 산해관을 피해 우회경로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때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농민반란군이 진격해 오고 있으니 자신을 도와 싸우자는 지원요청을 한다. 이에 도르곤은 과감하게 직진을 선택하게 되고 그 선택은 옳았다. 고속행군으로 산해관에 도착한다. 이후 오삼계 연합군과 함께 산해관으로 진격했던 반란군을 진압한다. 이 산해관 전투이다.
심양일기 가치
전투에 승리한 도르곤은 최대한 빨리 가서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쉬지 않고 북경으로 향했고 9일간 약 310km 620리 행군을 했으며 하루 이상 머무른 장소가 한 군데도 없을 만큼 북경만을 보고 직진했었다. 이 행군에 소현세자도 있었다. 하루에 100리 이상을 이동해야 했다. 청 세조실록에는 이 행군이 순조롭다 못해 평화롭게 기록이 되어 있다.
반면에 심양일기에는 한마디로 개고생이었다 는 기록이 있다. 행군의 긴박함과 다급함 전쟁의 참상, 황폐한 모습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청 공식기록에는 없는 전쟁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심양일기이다. 심양일기는 소현세자가 직접 쓴 일기가 아니라 세자시강원에서 소현세자의 동태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청의 탄생
북경에 도착한 도르곤은 불타버린 자금성을 보게 된다. 명나라는 1627년부터 1646년까지 농민 반란군 이자성의 난이 일어났고 이자성이 자금성을 불태우고 전리품을 이미 가지고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다. 이에 명의 16대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뒤에 올라가 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나무에 목을 메어 자결을 한다.
이에 도르곤은 추격군을 보내 이자성을 쫓았고 이후 명나라 백성을 귀순시키고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청나라가 명나라의 원수를 대신 갚고 새로운 중국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며 도르곤은 심양에서 북경천도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심양에서 북경 천도를 한 후 자금성에 있던 어린 청 황제 순치제도 북경에 10월에 도착하고 자금성에서 두 번째 즉위식을 올린다. 청 황제 순치제이다.
도르곤은 불타고 남은 자금성의 한 곳을 소현세자에게 주고 생활하게 한다. 이때 소현세자는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천주교, 역법, 과학기술등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 소현세자의 북경체류 기간 포함 1644년 6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의 기록이 없다. 단순 분실가능성이나 고의로 훼손 가능성등 여러 추측이 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심양일기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이렇게 소현세자는 8년 만에 볼모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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