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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천연두 역사와 치료 인두법과 지석영 종두법,우두법/혜민서터

by 365 ^^ 2020. 11. 5.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1회 2부]

 

오늘의 탐사지: 혜민서터 을지로 커피한약방

주제: 천연두 역사 
출연자: 설민석 

 

 

인류 역사상 최악의 병 천연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하나의 문명을 파괴할 만큼 모든 균과 바이러스를 다 합쳐서 가장 무시무시한 병이 천연두였다.

 

 

 

 

  천연두의 기원은? 

첫 시작은 바로 이집트이다. 

 

 

피라미드 속 미라로 발견된 람세스 5세가 천연두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천연두의 가장 오래된 물적 증거라고 추측되는 상황이다. 

 

천연두의 증상

천연두에 걸리면 발열,오한,구토 증상으로 시작 그리고 목과 입 안에 생기는 고름이 부풀어 오르며 고열에 시달리다. 고름이 터지면서 열은 잦아들지만 입 안에서 터진 고름으로 엄청난 감염이 발생하고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반점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천연두에 걸리면 3명 중 1명은 사망한다. 

 

 

천연두 환자 중 5~9%는 실명이 되고 고름이 났던 자리에 남은 천연두 흉터가 생긴다. 

 

람세스 5세 미라에서 선명하게 남은 천연두 흉터
람세스 5세 미라에서 선명하게 남은 천연두 흉터

 

천연두를 우리나라에서 마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흉한 모습으로 죽게 하니  쳔연두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붙여준 최상의 존칭어 '마마' 그리고 빨리 지나가시라고 온 마을을 풍비박산 내는 천연두를 보고 '손님' 이라고 지칭했다. 종기를 일컫는 단어 '창' 을 붙여 두창(역질 두 종기 창)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모든 단어들이 전부 천연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조때 우의정도 천연두를 앓았던 그의 모습
영조때 우의정도 천연두를 앓았던 그의 모습

 

지금도 코로나19는 감염 확률이 높은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코로나에 걸려도 무증상 확진자도 발생하는데 걸린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면역력의 차이 때문이다. 

 


조선후기 역병 관련 기록들  

당시 천연두 치사율은 30%

현종, 숙종, 영조  시대에 사망률이 높았던 이유는 면역력이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상이변으로 이때에 흉년으로 인한 식량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때이고 이로 인한 면역력이 약화되었다. 전 세계 평균 기온이 2도 정도 낮아지는 기상이변이 발생하는데 한 여름이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 꽃이 피는 등 연산군 때부터 영조 때까지 250~300년 동안 전 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에 접어들었다. 

 

심지어 이런 때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전쟁과 기상이변으로 농사를 지울 수 없는 환경이 도래하며 먹지 못해 천재지변에 인재가 겹쳤던 최악의 시기였던 것이다.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조선 팔도 전역이 대흉작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조선 팔도 전역이 대흉작

 

1670년에 경술년~신해년까지 경신대기근으로 조선 최악의 기근으로 기록된 이 기근은 전쟁보다 끔찍했던 자연재해와 배고픔에 내몰린 백성들의 참혹한 생활이 이어졌다. 이때 천연두가 온다. 

 

 

그러나 바이러스나 균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대기근과 역병 속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패륜 사건들이 발생했는데 식량 부족으로 입을 줄이려고 자기 아이를 강물에 던져버리고 엄마가 죽은 아이를 먹는 식인 사례마저 보고되기 시작했다. (현종 실록에 기록됨_) 

 

 

굶주림 앞에 인륜을 저버린 끔찍한 사건이다. 임진왜란때 기록을 보면 길가에 살점이 붙어있는 시신이 없을 정도였고 시신의 뼈를 부러뜨려서 골수를 빯아먹을 정도였다. 


굶주린 백성들이 속출하고 면역력이 떨어진 그때 역병이 번지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니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진휼청에서 곡식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

 

진휼청
진휼청

 

하지만 이마저도 지방은 제대로 운영이 안돼서 서울에서만 운영이 되니 한양의 진휼청으로 전국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문제는 농토를 방치하고 진휼과 방역제도가 잘 갖춰진 한양으로 이동하면서 북쪽 지방의 혹한과 천연두로 인해 거의 다 죽거나 서울로 내려오면서 지역별 인구 순위가 변화한다.

 

15세기 조선 시대 지역별 인구 순위
15세기 조선 시대 지역별 인구 순위

 

한양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몰려든 사람들이 바이러스 보균자가 된 채 한양으로 몰려드니 빠른 속도로 한양에 퍼지기 시작했다. 

 

 

 

대동법과 공명첩의 시행 

 

 

굶주림에 이어 천연두까지 돌며 비참했던 조선 백성들을 위해 임금은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는 '부자 증세' 로써 대동법을 실시 땅이 많은 지주가 재산이 없는 사람의 세금을 대신 납부하는 제도이다.

 

 

또한 백성을 구제할 재원 마련을 위한 또 다른 제도로 국가에 재물을 바치면 형식상의 관직을 주는 공명첩을 발행 한다. 재정충당을 위해 납속, 공명첩을 발행했다고 배웠으나 그 배경에는 기근과 전염병도 있었다. 납속과 공명첩 발행으로 양반의 수가 늘어 나고 전통 신분 질서 붕괴의 시작을 가져오게 된다.  이는 신분제도 철폐의 시발점일 수 있다. 

 

 

조선 시대판 재난 지원금은? 

 

견감이라고 있었다. 조세나 노역을 감면해주거나 빌린 곡식을 면제 또는 감해주는 것을 말한다.

 

견감 정의
견감 정의

 

오늘의 재난지원금이라는 정책과 비슷한 것이다. 


오가작통법.호패법 

 

조선 시대의 위생국이 있다면 지금은 질병관리청이 있고 지금의 자가격리가 있듯이 오가작통법이 존재했다.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서 서로를 감시하는데 이용하고 백성을 관리하기 위해 호패법을 강화시킨다.

질서통제의 목적으로 백성들을 감시하는 수단이 된 역병

 

대한의원

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1

 

 

1907년에 설립된 대한제국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내과,외과,안과 등 전문 분과 체계를 갖췄던 종합병원으로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용하다가 현재는 의학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한의원
대한의원

 

 

천연두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인두법
인두법은 15세기경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고름을 건강한 사람의 몸에 상처를 낸 후 살짝 바르게 하거나 천연두 환자의 딱지를 가루로 만든 후 건강한 사람의 코로 흡입해 넣는 방법이 있었다. 

 

 

항체의 개념으로 건강한 사람에게 천연두 균을 주입시켜 약하게 천연두를 앓게 하여 항체를 만들게 하는 것이 인두법이다. 그러나 인두법은 천연두균을 옮기는 과정에서 접종받은 사람의 약 2%가 사망을 했다. 접종자의 기본 면역력이 문제가 되었고 또 다른 문제는 접종받은 사람으로 인한 재확산이 문제였다.

 

 

정약용, 박제가가 사용한 방법은 바로 인두법이였고 정약용이 지은 의서<마과회통>은 홍역에 관한 의서이지만 천연두와 인두법에 대한 내용도 기록이 되어 있고 새로이 영국에서 개발된 우두법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고 연구중이였으나 정조가 승하하면서 정약용의 정적들은 천주교인 색출을 시작으로 같은 시기 박제가 역시 체포되어  그렇게 종두법 연구가 중단이 된다. 

 

우두법 (=종두법)
같은 시기 영국에서 천연두를 종식 시킬 백신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우두법이다.  에드워드 제너라는 사람이 천연두를 연구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제너
에드워드 제너

 

어느 날 친구에게서 옆 마을에 미녀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너는 당시 유럽 전역에 천연구가 유행했는데 친구의 말대로 옆 마을엔 천연두를 앓는 이들이 적었고 이들은 소 젖을 짜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들에게 소젖을 짜면서 어릴 때 우두에 걸렸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소에게는 치명적인 우두(소의 천연두)지만 사람에게는 약하게 앓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제너는 우두균으로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제너의 우두 접종법으로 유럽에서 천연두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백신'이라는 이름의 유래

 

소의 천연두를 뜻하는 라틴어 '백시니아' 에서 나온 백신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지석영과 종두법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지석영은 서당 다닐 돈이 없어 주로 중인 계층이 응시했던 잡과시험을 위해 의원 밑에서 의술을 배우게 된다.

 

종두법을 도입 보급한 근대의학의 선구자

 

그렇게 한의사 박영선에게 의술을 배우게 된 지석영은 백성들이 가장 고통받던 병, 천연두를 고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1876년 스승 박영선이 일본에 가서 종두법 관련 서적을 들여오게 된다.

 

 

치사율이 높았던 인두법에 비해 안전한 종두법을 선택한다. 

그때 부산에 재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들이 자국민들에게 종두를 접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차를 탈 돈이 없어서 한달을 걸어서 (약 20일) 부산으로 간다. 

 

지석영의 노력에 감동한 일본 의사들은 종두법 백신은 물론 두 달간 접종 방법에 대해 배워서 서울로 돌아오던 중 처가가 있는 충주에 방문한다. 접종전에 임상실험이 필요했고 어른들은 이미 대부분이 천연두에 노출된 경우였기에 천연두를 전혀 앓지 않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아이가 지석영의 처남으로 당시 두 살배기였던 아내의 동생이었다. 

 

그러나 지석영의 말에 펄쩍 뛰는 가족들을 종두법에 대한 충분한 설명으로 가족들을 설득해 마침내 두 살배기 아이에게 종두를 접종한다. 열이 올랐다 곧 열이 내리는 것을 확인한 지석영은 항체가 생겼는지를 확인하게 위해 진짜 천연두 균을 넣어본다.  발열 증상 후 다행히 아이가 회복한다. 더 많은 임상 실험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동네 아이들 40여 명에게 종두를 접종하고 그렇게 1879녀 최초로 실행한 종두법은 성공을 거둔다. 그 이후 1895년 종두법이 의무적으로 실시된다. 


지석영의 친일 행적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 시기에 일본군의 통역 및 길 안내 등을 맡았던 지석영은 동학농민군 토벌에 도움을 주는 과와 더불어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까지 하게 된다. 

 

 

 

 

 

 

혜민서 터 
(카페 커피한약방)

 

국립의료기관과 비슷 백성을 치료하고 의약관리, 의녀 양성을 한 관청으로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이 거쳐 간 곳으로 저렴하게 백성을 치료해주던 혜민서였다. 

 

 

커피 한약방과 혜민당 모두 교차 이용이 가능하다. 

 

 

현재는 혜민서 터에 세워진 한약방 콘셉트의 카페로 운영중이다. 

 

 

 

현재는 혜화점도 오픈이 된 상태인데 혜민서 터는 을지로점이다. 

 

 

 

 

선녀들 리턴즈 6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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