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인물 중에서 절대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인물 ,프랑스를 가장 오래 통치했던 왕 루이 14세 “짐은 곧 국가다” 라는 말로도 유명하지만 이 말의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14 세를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바로 짐이 곧 국가다 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절대군주였던 태양왕 루이14세이다.
루이 14세 왕이 되기 이전 정치적 상황
루이14세가 왕이 되기 이전의 프랑스의 상황은 두 개의 큰 내전이 있었다. 첫 번째가 가톨릭 vs 개신교 종교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과 프롱드의 난(1648~1653)인 프랑스 내전이다. 루이 13세에서 14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프랑스는 봉건제도를 철폐시키고 절대왕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루이 14세 어린 시절
루이14세는 1638년 9월 5일에 태어나서 77년을 산다. 당시 프랑스 평균 수명이 25세인것을 감안하면 장수한 것이다. 태어난 곳은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생제르맹앙레 궁전이다. 루이 14세의 미들 네임에 디외도네 (신이주신 선물) 가 들어가 있는데 루이 13세(아버지)는 1615년 결혼을 한 후 1638년에 루이 14세가 태어난 것이다. 결혼 후 23년 만에 태어난 것이다.
마자랭 섭정
1643년 아버지 루이 1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루이14세는 고작 5세에 왕위를 물려받는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스페인 출신 어머니(안 도트리슈)가 섭정을 하게 되고 이탈리아 성직자 출신 쥘 마자랭 재상을 임명하여 정치를 맡겼다. 그러나 그는 과한 세금을 걷고 관직을 만들어 파는 등의 독재에 가까운 월권을 행사했었다.
프롱드의 난(1648~1653)
5년 뒤에 프롱드의 난 (새총이란 의미) 이 일어난다. 섭정 중인 마자랭의 집에 새총을 쏜 데서 시작된 반란이다 . 전통적으로는 왕과 귀족의 분쟁시 관습법을 통해 처리하고 있었는데 왕과 귀족의 중재 역할을 하는 기관(PARLEMENT)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려 하자 일어난 내전이 프롱드의 난(1648~1653)이다. 5년간 지속된 부르봉 왕권의 큰 위기였다. 이 반란으로 루이 14세는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린 루이 14세는 프롱드 세력에 의해 암살당할 뻔하고 루이 13세 때부터 마자랭 재상까지 이어지는 절대주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반란을 여러차례 일으켰다. 1649년 1월 겨울 왕비와 재상 마자랭이 어린 루이 14세와 동생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한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열악했던 환경 속에서 매일 밤 추위에 떨어야 했던 어린 루이 14세였다.
2차 프롱드 난
루이 14세 삼촌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까지 가담한 2차 프롱드 난이 발생하면서 다시 한번 파리를 탈출하려하지만 발각되어 파리 시민이 궁으로 쳐들어오자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잠든 척 연기를했던 루이 14세를 한참을 보다가 물러났다고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에게조차 등을 돌리는 귀족의 모습, 이런 기억은 루이 14세의 기억 속에 큰 치욕과 수치심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리라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된다.
오 년간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분열로 지칠대로 지친 귀족과 민중들은 왕이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길 바랬고 결국 부르봉 왕가를 복귀시키기에 이른다. 이렇게 1652년 루이 14세는 승리자의 이름으로 파리에 입성하게 된다. 그리고 1654년 16세의 나이에 대관식을 올린다.
루이 14세의 권력 과시 방법
루이 14세의 발레극
자신이 진짜 왕이 되었음을 알리게 위해 프롱드 파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발레극을 선보인다. (1653년) 이 극에 루이 14세는 직접 출연을 한다. 매일 2시간씩 27년간 발레를 연습했던 왕이었기 때문에 태양의 신 아폴론으로 출연해서 거대한 뱀을 처단하는 장면을 연기한다.
루이 14세 패션
루이 13세 시기에는 패션 산업이 발전을 이루는 시기로 그 이후의 루이 14세 또한 권력에 대한 집착과 광기를 보여주는 베스사유 궁전과 사치스럽고 화려한 이미지를 왕권 강화의 도구로 사용하며 루이 14세는 그야말로 원조 패셔니스타일 만큼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 패션을 선보였다.
태양왕 루이 14세 (재위 1643년 ~ 1715년)
1661년 루이 14세 때 섭정 프랑스 제1 권력자 재상 마자랭이 사망하면서 진정한 프랑스의 통치자로 우뚝 서게 된다. 재상 마자랭이 죽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앞으로 재상을 두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국가의 재정을 살펴봤으나 반복된 내란과 계속된 전쟁으로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마자랭 사후에 그의 재산을 살펴보니 엄청나게 드러난 재산이 확인되었다.
이때 루이14세의 프랑스 재정을 담당했던 니콜라 푸케에게 국고의 절반이 흘러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 와중에 자신의 성 완공을 축하하는 대규모 연회를 개최했다. 거대한 운하와 분수 예술품까지 사치의 절정을 보여준 푸케의 성이었다. 루이14세의 루브루 성보다 훨씬 화려한 푸케의 성이었다. 이에 푸케를 국고 횡령 혐의로 체포하고 결국 반역죄까지 더해서 종신형과 재산 몰수를 선고한다.
이 푸케를 잡아들인 인물이 다르타냥(달타냥) 이다. 삼총사의 다르타냥은 실존 인물로 나중에 네덜란드 전쟁에 참전 후 사망한다. 니콜라 푸케의 체포는 귀족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루이14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귀족 탄압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루이 14세의 왕권 강화 도구
♧ 귀족 증명/서열화
귀족 증명 서류를 제출하라고 명한다. 이에 귀족들은 서류를 위조, 뇌물을 쓰는 등 신분증명을 위해 다양한 불법 들이 행해졌다. 실제로 귀족 수가 가장 많았던 프랑스 서부의 브르타뉴 지방은 1650년 귀족이 약 4만명 정도 있었으나 1700년 약 2만 1천 명으로 절반으로 줄게 된다. 또한 귀족들의 서열화를 진행한다.
♧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14세의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인 동시에 가장 통치하기 힘든 귀족들을 길들이고 조련하는 장소로 이용했던 것이다. 귀족들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덫과 같은 곳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노브레스 오블리주' 의미
베르사유 궁전에 살다보니 귀족들은 사치와 낭비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것을 바로 노브레스 오블리주라고 한다. 오늘날의 의미는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 의식과 덕망이 높아야 한다는 의미지만 이 말을 직역하면 '귀족의 의무'로 평민이 해야 될 일을 귀족이 하면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고 돈을 쓰는 것이 귀족의 의무로 국가 경제 순환에 큰 도움이 되었다.
♧ 또 하나의 왕권 강화 수단 에티켓
루이14세 때는 황당한 에티켓들이 많았다. 에티켓은 차별을 의미하고 시기와 질투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곧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결과는 곧 규칙을 만든 국왕에 대한 절대 복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왕이 귀족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루이14세는 출입하는 귀족들을 서열화해서 서열에 맞는 고유한 에티켓을 부여했다. 서열에 맞게 인사 방법 마다 다른 에티켓을 부여(모자를 벗고 인사하는등) , 의자에 앉을때도 특권을 부여 등받이와 쿠션 팔걸이가 있는 의자와, 스툴 등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을 모두 지정했다.
▷에티켓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식사 자리였다. 앉아서 식사를 같이 하는 귀족과 서서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귀족들의 서열이 달랐다.
▷왕의 방을 노크할 때는 노크 대신 새끼 손가락으로 왕의 방문을 긁었다고 한다.
▷국왕이 매년 연말에 쥐스토코르(justaucorps) 를 입을 수 있는 명단 40명을 발표했다.
▷루이14세는 베르사유에 거처하는 귀족들에게 다양한 직책을 부여한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정책이라도 왕의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그 직책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독특한 왕실 직책 중에 변기 담당, 용변 닦아주는 담당자가 있었는데 왕의 마지막 위생관리를 귀족이 한다고 하여 좋은 직책이라 생각했다.
▷아버지 루이 13세도 겨우 9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왕권을 잡게 되니 불안전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대한 파티, 행사와 화려한 패션 등의 사치스러운 이미지를 통치의 수단으로 왕의 위엄을 과시하는 전략을 썼다.
전쟁광 루이 14세
루이14세는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에까지 자신의 절대 권력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친정 선포 이후 년 54 년동안 약 37년간 전쟁을 할 정도로 전쟁광이었다.
17세기 초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30 년 전쟁(1618~1648), 구교를 지지하던 스페인은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와 전쟁을 한다. 오랜 전쟁을 종결하는 평화조약을 일환으로 프랑스 루이14세와 스페인의 공주 마리테레즈의 국혼이 성사됐다.
결혼의 조건
프랑스는 오직 남자에게만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스페인은 여성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주어졌다. 이에 왕위 계승권이 프랑스로 넘어가는 것을 견제했던 스페인 왕은 마리 테레즈의 왕위 계승권 포기를 요구했고 대신 스페인은 프랑스에 거액의 지참금을 지불하기로 한다. 그러나 스페인은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금액이 너무 커서 지참금을 지불할 수 없었던 스페인이었다. 이에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한 루이14세였다.
귀속 전쟁
이를 빌미로 17세기 초 당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벨기에 지역(당시 네덜란드 지역)을 루이14세가 공격한다. 귀속 전쟁을 일으킨 루이14세는 릴을 비롯 네덜란드 남부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루이14세 4년 뒤에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다시 침략 한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상당한 영토의 팽창을 이룬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1688~1697)
루이14세의 계속된 전쟁의 승리로 유럽의 영향력이 커지자 루이14세의 야망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국가들은 대동맹을 결성한다. 당시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게 되자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 앙주 공작을 왕으로 지목한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701~1714)
스페인 왕국을 상속받게 된 프랑스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움직임이 보이자 전 유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701~1714)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삼국이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킨다. 루이14세의 집권기간(54년)동안 약 37년간 전쟁을 했다.
불과 100년 전 프랑스 병력은 최대 1만명이었는데 루이14세의 병력 최대는 65만 명이었다. 이 국방비를 세금으로 충당해야 했는데 그것도 재정이 모자라 관직을 팔거나 귀족의 작위도 매매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28억의 부채를 루이14세 사망 후 루이 15세(리브르)에게 물려주게 된다.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요구하며 종교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구교와 신교의 갈등으로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프랑스의 종교 전쟁을 종식시킨 왕이 루이 14세의 할아버지 앙리 4세이다. 종교 전쟁을 종식시킨 칙령 낭트 칙령을 발표한다.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
1685년 루이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한다. 이는 x 신교도 에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낭트의 칙령(1598) 을 폐기한다는 내용이다. 루이 14세 친정 선포 때부터(1661) 퐁텐블로 칙령 때가지 신교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그들의 특권을 뺏는 칙령을 300번이나 반포한다. 신교도를 군인들을 이용해 고문, 탄압은 물론이고 교회를 파괴했다.
루이 14세의 최후
루이 14세는 그의 식습관으로 인한 어려서부터 많은 질병에 시달렸다.
73세 루이 14세의 아들이 천연두로 사망하게 되고, 1년 뒤에 왕세손이 홍역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증손자 마저 사망하게 된다.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들이 줄줄이 사망하게 되면서 결국 남게 된 인물은 아직 어린 둘째 증손자 루이 15세(즉위 당시 5세)만 남게 된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를 모두 잃고 나서부터 루이 14세의 건강으로 극도로 악화된다. 다리가 썩기 시작했고 결국 1715년 9월 1일 아침 태양왕 루이 14세는 사망한다.
태양왕 루이 14세 이후
루이 14세의 왕권 강화 정책은 당시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후대로 갈수록 문제가 발생한다. 루이 15세, 16세 때는 왕권강화의 의미는 사라지고 사치와 향락만이 남아 그들의 일생이 되고 프랑스 재정 파탄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성들은 극심한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사치와 향락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게 되면서 루이 16세 때는 드디어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네플릭스에서 방영하는 베르사유(VERSAILES)는 루이 14세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로 루이 14세의 인간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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