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규의 원작소설 [평강공주1,2] 를 바탕으로 제작한 드라마 <달이 뜨는 강> 은 고구려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이야기를 평강공주에 좀더 포커스를 맞춰 재해석한 픽션 드라마다. 그러나 이전에도 여러 번 드라마로 만들어질 만큼 인기가 많은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이야기를 전래 동화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 >에 있는 실제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부식이 신라 중심적으로 쓴 역사서로 삼국사기 열전에는 김유신, 을파소, 온달 등 69명의 인물 전기가 기록되어 있고 주로 충신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된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 전의> 특징은 신라 중심적 역사서임에도 고구려의 바보 온달이 충신으로 나오며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섞여있다는 점이다.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이야기를 통해 6세기 고구려 사회의 정치적 변화를 살펴보고 고구려 사회의 안정과 잃어버린 옛땅을 회복하기 위해 희생과 고통을 감내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온달은 왜 바보로 불렸을까?
기록에 보면 바보온달은 얼굴은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명량했고 가난해서 항상 밥을 빌어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항상 헤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시장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온달을 사람들은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바보온달의 바보라는 의미는 지능이 낮은 바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살림에 자기 잇속도 못 챙기는 온달의 모습이 남들 눈에 어리석어 보인 듯하여 바보 온달이라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는 온달 장군은 온씨의 국내 시조이자 고구려의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출신 신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평강공주에 대해
고구려 25대 왕은 평원왕=평강왕이라고도 부른다. 평강왕의 공주가 바로 평강공주이다.
평강공주는 소문난 울보였다. 왕이 말하길
너는 울기를 잘하니 이다음에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 고 했다.
평강공주가 16세에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왕실에서 정한 귀족 집안과의 혼인을 거절하고 바보온달에게 청혼을 한다. 이에 온달은 평강공주에게 말했다.
'어린 여자가 할 행동이 아니고 우리는 가난해서 귀인을 베필로 맞이할 수 없다'
이렇게 바보온달은 평강공주의 청혼을 거절한다. 당시 신분제가 엄격했던 고구려 사회에서 가난하고 미천한 바보라 불리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합은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자 평강공주는 서로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을 하고 그 후 바보온달은 공주의 도움으로 전답과 말 등을 마련해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익힌다.
평강공주의 아버지
평원왕(재위 559∼590) 당시 고구려 정치상황
고구려 평원왕은 559년에 즉위한다. 평원왕은 장수왕 이후 계속된 왕위 쟁탈전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 후 혼란 속에 즉위한 왕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을 겪는다.
22대 안장왕이 피살되고 이어지는 554년 안원왕 때는 외척 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이천여 명이 죽고 557년 24대 왕 양원왕(평원왕의 아버지) 때는 고구려 역사상 최초의 반란인 귀족 간주리가 국내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간주리 반란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귀족세력 간의 갈등이 극심했던 때로 나라 안팎이 혼란의 시기였다.
이때 고구려왕 계보를 보면 광개토대왕(392-413)-장수왕(413-491)-문영 왕(492-519)-안장왕(519-531)-안원왕(531-545)-양원왕(545-559)-평원왕(559-590)-영양왕(590-618)-영류왕(618-642)-보장왕(642-668) |
평원왕의 왕권강화 정책
이런 상황에서 평강공주의 아버지는 왕이 되고 가장 우선시 되는 과업은 왕권강화였다. 평원왕은 아버지 양원왕에 이어 수도 평양성의 내성인 장안성을 축조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 한편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왕권강화를 도모한다.
신진 무인 세력의 상징적 인물 온달
고구려는 장수왕 때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고 이때부터 평양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이 등장한다. 평원왕은 전통적인 고구려 세력 대신 적극적으로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는다.
장수왕 이후 등장한 신진세력으로는 양원왕 때 인물은 왕산악(거금 고를 만듦), 영양왕 때는 을지문덕 등이 있다. 평원왕 때 등장한 신진 세력의 하나는 온달이라 추정하며 신진 귀족을 통한 왕권강화라는 배경 속 이런 고구려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보온달은 어떻게 왕의 사위로 인정받게 되나?
당시 고구려 사회는 무예를 중시했고 평원왕(평강공주의 아버지) 역시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다고 한다.
고구려 때 뛰어난 무예실력과 전쟁에 출정해 공을 세우는 것은 출세의 중요한 척도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은 매년 낙랑 언덕에서 열리는 사냥대회에 참여했고 그 대회에서 가장 많이 사냥하고 남보다 뛰어나 주목받기 시작한다.
사냥대회는 왕도 참석하는 인재 등용의 장이였고 이를 통해 바보온달은 자신의 실력과 존재를 알리게 되는 신흥 무인 세력으로 떠오르고 사냥대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온달은 그 후에 왕과 함께 중국 후주와의 전쟁에 나서게 된다. 그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에 비로소 바보 온달이 아닌 왕의 사위로 인정받게 된다.
온달 장군의 고구려 옛 영토수복 전쟁
평원왕 사후 26대 영양왕 때(590년) 온달은 신라와의 대대적인 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나선다. 온달 장군은 이때
"계립현과 죽령 이서의 땅을 확보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노라" 고 다짐한다.
계립현과 죽령 이서는 어디?
6세기 중반 고구려가 귀족 간의 갈등과 중국 북방민족과의 전쟁에 휘말려 있는 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551년 신라의 거칠부에게 죽령 이북의 10군을 빼앗긴다. 그 후 고구려는 이곳을 수복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고구려는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달 장군의 죽음
591년 온달 장군은 신라에 빼앗긴 옛 고구려의 땅(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자 친구 정책으로 확보)을 수복하기 위해 온달산성에서 전쟁을 하게 되고 그 전쟁에서 온달은 신라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의 온달 장군 최후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단성 아래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길에서 죽었다.
여기서 언급하는 아단성이 온달산성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여전히 논란이 있다. 온달 장군이 죽은 후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온 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그만 갑시다 장군'라고 말하자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온달 장군의 전쟁 참여에 대한 상반된 의혹
# 평원왕 때 온달은 이미 사위로 인정받았는데 굳이 전쟁에 나선 이유에 대한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데 591년은 평강공주의 형제인 영양왕이 즉위했던 시기로 왕의 권력 강화를 위해 위협적인 세력을 제거할 수도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 그러나 기록상 온달 장군은 전쟁 참여를 자청을 했고 이미 중국의 새로운 세력 수나라가 등장해 평원왕의 정치적 기반이 영양왕 때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태로 영양왕과 온달 장군은 어떻게 고구려를 함께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논의를 했을 것으로 추정 그러므로 온달은 영양왕을 지원하는 위치였을 것이다.
온달의 업적
중국 후주 무제의 요동 침공 당시 온달이 막아내고 553년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상실한 영토를 590년에 온달은 계림령과 죽령 이서의 500여 리를 회복하고 전사했다.
온달의 전사지에 대한 논란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VS 서울 아차산성
현재까지도 온달의 전사지는 학계에서도 아차산성과 온달산성 중 어디인지에 대해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고 현재도 계속 조사 발굴작업을 진행 중이다.
오늘날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을 중심으로 알려져 있고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인되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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