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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기황후 실제 이야기 (역사왜곡, 실제사진,기황후 결말)

by 365 ^^ 202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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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126회 리뷰, 이미지 드라마 기황후]

 

 

시청률  29.2% 흥행을 기록한 드라마 기황후

 

칭기즈칸의 제국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몽골(원나라)의 마지막 황후는 바로 고려인 기황후이다. 

 

노란부분이 원나라 영토: 중국 문학에서 보통 나쁜 이미지로 등장하는 기황후

 

기황후에 대한 실제 역사적 기록 

 

기황후 그녀는 누구인가? 

 

기황후는 행주 기씨 집안 8남매중 막내딸로 고려에서 차출된 공녀 출신이다. 기록에 의하면 기황후는 미모가 뛰어나고 총명하고 지혜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행주 기씨 집안에서 위의 사진 (왼쪽)을 가지고 기황후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기황후는 어떻게 원나라에 갔나?

 

몽고는 1231년(고종 18년) 처음으로 고려를 침략한다. 그 이후 몽골은 30년 동안 고려를 무려 7차례나 공격한다. 그때마다 고려는 대몽항전을 펼치지만 고종 46년 결국 원에 항복하고 그 이후 고려에는 원나라 공주가 시집을 오거나 원나라의 요구로 공녀(공물로 바치는 여자)를 원나라로 보내는 내정간섭이 시작된다.  

 

당시에 고려는 대원으로 부터 정치적 간섭을 받고 있었고 물적 수탈+ 인적수탈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녀는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과 결혼할 여성을 징발했다. 처음 초반 공녀 대상은 반역한 사람의 처, 과부, 승려의 딸 등의 뭔가 하자가 있는 사람들로 차출했으나 점차 일반 여성도 징발을 했던 것이다. 

 

 

 

이런 시대에 행주 기씨 기자후의 막내딸, 기황후도 공녀로 뽑혀서 원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이들은 운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비참하게 노예같은 삶을 살수도 있고 일부는 궁에 들어가 궁녀가 되거나 운이 좋은 경우 원 고위 관료와 결혼을 해서 자리를 잡는 사람도 소수지만 있었다.

 

공녀로 원나라로 끌려가는 기 씨 : 당시 몽골은 전세계를 지배했지만 다른나라의 공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오직 고려에만 있다. 원 관계에서 고려의 가장 비참한 모습이다.

 

 

공녀가 했던 일은?

이들은 운에 따라 운명이 달라졌다. 비참하게 노예같은 삶을 살수도 있고 일부는 궁에 들어가 궁녀가 되거나 운이 좋은 경우 원 고위 관료와 결혼을 해서 자리를 잡는 사람도 소수지만 있었다. 그래서 미래가 불안해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남장을 하거나,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기도 하고 일찍 결혼하는 조혼의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공녀로 끌려가 기황후는 제일 처음 궁중에서 차 따르는 궁녀가 된다. 

 

처음 궁중에서 차를 따르는 일을 했던 기씨: 나중에 일부 계층에서 딸을 공녀로 보내려고 하기도 했다. 특히 기황후 등장 후 생긴 몽골 드림을 이루기 위해 이같은 짓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비참한 삶을 살았던 공녀들이다.

 

 

기황후는 어떻게 황후가 되었나? 

원나라 명종의 태자 토곤테무르가 11세에 고려 대청도로 유배를 와서 1년 동안 머물다 원나라로 돌아가 황제가 되는데 그가 바로 원 순제이다. 

 

드라마 원 순제 역

 

1333년 황제가 된 원 순제는 차 따르는 궁녀 기씨를 만나게 되면서 총명하고 지혜로운 기 씨를 총애한다. 이렇게 보잘것 없는 차를 따라는 궁녀가 황제의 사랑을 받자 당시 제1 황후였던 타나실리는 여러 차례 기 씨를 채찍으로 때리고 인두로 지지기도 할 정도로 기 씨를 질투했다.

 

드라마 기황후 속 질투에 기씨를 채찍질 하는 타나실리 황후

 

당시 타나실리는 순제의 아버지(문종)를 죽인 순제의 삼촌 (드라마 속 연철 역)의 딸로 순제와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다. 1335년 타나실리 형제들이 역모를 꾀하면서 타나실리 황후도 연관이 되어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드라마 기황후 속 사약을 받고 있는 제 1황후 타나실리

 

황후가 된 후 기황후

 

나타실리가 죽고 순제는 궁녀 기 씨를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기씨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바얀에 대한 기록

 

그 뒤 기황후는 임신을 하게 되고 아들 아유시리다르을 낳는다(1337년). 그리고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제국의 황태자로 등극한다. 

 

제주도 원당사 5층 석탑 : 아들을 바라는 기황후의 청을 들어 원 순제가 세웠다고 한다.

 

기황후의 측근 고려인 환관 박불화 등 고려인 세력과 고려에서도 기황후의 황후 추진을 도와 기황후는 우여곡절 끝에 제2 황후가 된다(1339년).

 

기황후가 몽골의 황후가 될수 있던 결정적 이유

아들의 탄생으로 고려인 기씨는 제 2황후에 등극한 후 자정원이라는 기구를 설치한다. 이곳은 기황후의 권력 기반이자 재정 기반이 되기고 했던 기구이다.  원래는 황태후의 보좌기구였던 휘정원이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이를 흡수해 자정원으로 개편한다. 그리고 자금을 장악한다. 자정원은 기황후의 세력 형성에 큰 역할을 했고 이 기구에 고려 출신의 환관을 배치했다. 

 

드라마 기황후 속 바얀황후 최후 모습

 

이후 1365년 제1 황후 바얀 후투그가 죽자(1365년) 제1 황후로 등극한다. 

 

1339년 궁녀 기씨는 제 2황후가 된다.

 

기황후는 제2 황후 때부터 30여 년 동안 실권을 잡고 원나라 황실의 주인이 된다. 쿠빌라이가 원을 통일했을 때가 1271년으로 그 후로 원나라는 100년 동안 지속되었으니 기황후의 30년 기간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고려 양(고려의 풍습) 유행 

 

황후가 된 고려여인 기황후로 인해 고려 양(고려의 풍습)이 유행했다. 고려 의복이 유행을 한다.

 

고려의 의복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치마로 이루어진 의복
몽골의 전통양식은 아래 위가 하나로 붙은 양식의 의복
음식또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병

 

기황후 실제 결말 (최후)

 

당시 세계 제일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지만 그녀가 절대 권력을 잡았을 땐 이미 원나라는 기울었고 쉴 새 없이 내전이 벌어지면서 새로운 한족의 명나라(홍건족: 원을 멸망시킨 주원장)가 원나라를 공격하자 북쪽으로 피란을 가던 도중 남편이 죽고 기황후에 대한 기록도 거기까지만 있다. 

 

 

 

 

 

 

 

베이징 도서관 희귀본 실에 북순사기 책에 기황후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다.

 

기황후의 최후가 기록이 담긴 중국 북순사기

 

도피하는 기황후와 순제를 보필하던 신하가 17개월 동안 쓴 책으로 기황후와 원 순제가 대도를 떠난 것은 1368년 7월로 기황후는 도피 중에 원병을 보내지 않는 고려를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1년 6개월의 도피 끝에 원의 마지막 수도 카라코롬에 도착 후 순제는 모든 권한을 황태자에게 이양하고 1370년 세상을 떠난다.

 

원의 마지막 수도 카라코롬

 

기황후가 낳은 아이는 황태자가 되지만 기황후의 행방은 관련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기록이 있는데 황후는 고려에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는 기록이다. 

 

 

기황후 묘(무덤)

 

기황후가 죽고 300 년 뒤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기록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경기도 연천에 기황후 릉이 남아 있다'라고만 역사서에 언급되어 있고 정확한 위치는 확신되지 않는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의 기황후의 묘로 추정되는 곳 (조그만 야산), 실제 기황후의 묘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이 근처에서 고려양식의 묘를 둘러쌌던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기황후 역사왜곡에 대해..

 

기황후에 대한 부정적 기록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에 의해 쓰인 원사에는 기황후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이다. 고려사와 원사에 기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부정적이다. 

 

기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은 기황후의 오빠 기철도 한몫을 한다. 원나라 기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기철은 고려 내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며 극악한 횡포를 부린다. 기철은 충목왕에 대한 개혁 정치를 좌절시키고 각지의 농장에 농민들을 수탈하고 충혜왕에 체포되어 연행될 때 앞장서기도 했다. 결국 기철은 원나라 세력이 약해진 원 말기 공민왕에 의해 비밀리에 처형당한다. 

 

 

 

 

 

 

드라마의 기황후는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고 고려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역사에 나오는 기황후는 친원파였다. 고려의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개입하여 자신에게 부리기 쉬운 왕으로 세우는 등 고려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일들을 자행했다 

 

 

기황후의 고려에 대한 긍정적인 기능 

 

그러나 기황후,순제 때 공녀 징발을 금지하고 원 내부에서 자주 제기되던 고려를 원나라의 하나의 행성으로 편입하자는 입성론 논의도 순제때 사라졌으며 원 말기 공민왕 때부터는 원의 정치적 간섭이나 경제적 수탈이 매우 줄어드는 등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동안 역사기록은 기황후에 대해 너무나 부정적인 면만 부각이 되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시대가 우리 역사에 그렇게 자랑스럽지 못한 시대였다는 것도 상당한 이유가 된다.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기까지 기황후를 좀 더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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