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인
조선시대 부검하는 사람으로 변사체 검시를 담당하는 전문가였다. 조선시대 법의학서 '무원록'에는 죽은 자는 원한이 없다. 는 뜻으로 모든 죽음에 원망이 있게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오작인은 조선시대 천시받았던 직업 중에 하나이다. 오작인은 공익을 위해 일했지만 변사체를 만진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 천시받았던 직업이었다.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지만 신분적 한계로 존경받지 못했던 일이다.
검시 도구
- 술지게미: 상처 부위를 닦아 상흔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함.
- 삽주뿌리: 부패한 시신의 악취를 없앤다.
- 은비녀: 항문이나 입에 넣어 색깔 변화를 통해 독살 여부를 판별했다.
- 백지: 시신에 덮어 눈코입에 붙여 독기가 묻어 나오는 것을 관찰한다.
- 단목탕: 향나무 끓인 물은 시신을 닦는 데 사용한다.
1904년에 벌어진 양반 안재찬 살인 사건
양반 안재찬이 부인 황 씨가 정이문의 집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신고가 접수되었다. 안재찬은 부인을 죽인 범인으로 정이문을 지목한다. 사건을 맡은 오작인 김일남은 은비녀를 넣어 독살 여부를 확인했으나 은비녀 색깔이 변하지 않았고 시체 곳곳에서 발견된 타살의 증거가 있었다.
놀랍게도 살인 말은 바로 남편 안재찬이었다. 남편은 아내를 상놈 정이문과 내연 관계를 오해한 것이다. 격분한 남편은 아내를 때리고 정이문의 집에 숨진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다.
오작인은 목둘레에 일자 흔적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목을 졸라 죽인 것이라는 단서를 토대로 남편을 추궁해 자백을 받아냈다.
보장사
보장사는 5세기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던 직업으로 각 지방을 오가며 각종 문서를 전달하던 사람이다.
한반도는 산이 많은 지형을 가진 우리나라에 신체가 환경에 맞게 발달이 되어 빠르고 오래 달릴 수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궂은 날씨로 인해 지체가 되면 보장사는 처벌을 받았다. 보장사를 통해 조정의 동향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정보를 빠르게 입수할 수 있었던 양반들이었다.
착호갑사
아무나 지원할 수 없었던 호랑이 잡는 사람을 말한다. 착호갑사는 착호갑사 부대라고 해서 군대편제로 존재했던 직업이다. 조선시대 법전 경국대전에는 군대를 조직하는데 착호갑사의 수를 440명으로 명시했다.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랑이 사냥터였다. 원활한 목재 확보를 위해 벌목과 입산을 막았던 조선시대는 사람의 발길이 끊긴 숲에 호랑이 개체수가 증가를 했고 이로 인해 가축과 사람에게 피해가 심했다.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조선왕조실록) 철종 때까지 조정에 보고된 사망자 수가 약 3989명에 이르렀다.
호환은 호랑이로 인한 환란(우환)이란 뜻의 호환을 막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했던 조선이었다. 착호갑사부대 담력과 무예가 출중한 군인을 선발했는데 3m 넘는 호랑이와의 싸움에 목숨을 잃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착호갑사 되기 위한 조건
착호갑사의 조건은 180보 밖에서 한발 이상 명중해야 했고 착호갑사의 활은 뼈로 만든 각궁 대신 크고 무거운 살상력이 뛰어난 목궁을 사용했다. 두 손에 각각 30kg을 들고 100보 이상 걷기, 무예 출중 등의 조건이 있었고 가장 먼저 호랑이를 잡는 사람이 착호갑사가 될수 있었다.
17세기 이후 조총을 사용했던 착호갑사들이지만 화승총은 명중률이 떨어져 호랑이를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착호갑사의 성과급으로 받은 것은 호랑이 가죽으로 당시 110냥이 초가집 1채 가격이었는데 호랑이 가죽이 초가집 1채 가격과 같았다고 한다.
조선의 예능인 전기수
전기수는 소설을 읽어 주는 직업이다. 저잣거리에 자판을 깔거나 담배 가게 한쪽에서 소설을 낭독하는 직업으로 억양을 바꾸고 몸짓을 곁들여 뛰어난 화술이 관건인 직업이었다.
종로 담배가게 살인사건
전기수의 활동영역은 주로 종로였는데 종로 담배가게 살인사건이 유명하다. 전기수는 실감 나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전기수의 실감 나는 연기로 관객이 너무 몰입한 나머지 주인공에 몰입된 청중 중 한 명이 간신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임경업 장군의 대목에서 흉기로 전기수를 살인한 사건으로 조선왕조 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전기수가 돈 버는 방법, 요전 법이라고 하여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전기수는 침묵하면 청중들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돈을 던지는 것이다.
18세기의 소설은 대여점이 따로 있는 문화 사치품이었고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문맹률은 90% 이상이었다. 그러나 전기수 덕분에 문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도 소설을 구전을 통해 소설을 향유할 수 있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백성들의 속마음을 대신하던 전기수였다.
똥장수
전통시대 도시 인프라 중 배설물 처리는 매우 중요했다. 인분과 축산 폐수 처리로 인한 한양의 수질오염은 심각했고 당시 배설물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던 조선 조정이었다.
강희맹의 요통설 중에는 공중화장실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큰 시장의 으슥한 곳에 소변통을 설치했는데 양반들이 이를 이용하면 불결하다 비난했다. “
18세기 후반 민간인 배설물 처리업자의 활동이 본격화된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대명사로 불리던 똥장수의 주요 고객은 도성 주변의 채소 재배 농가였다. 비료를 필요로 하는 농가들에게 돈을 받고 배설물을 납품했던 사람들이다.
[이슈 픽 쌤 39회 리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