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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6.26 전쟁 정전협정 왜 길어졌나? 불완전한 정전 협정문으로 인한 사건들은 ?

by 365 ^^ 2021. 6. 24.

6.26 전쟁 정전협정

 

6.25 전쟁 중 정전협정은 세계 유례를 찾기 힘든 가장 긴 정전협정이었다. 왜 이렇게 협상이 길어졌을까?  왜 종전이 아닌 정전이었을까? 

 

정전 협정의 정식 제목

의문 1.

유엔군이 정전 협정의 당사자가 되어 있다. 원래 유엔은 국제 갈등과 분쟁을 중재하는 기구인데 남측을 돕기 위해 유엔이 군대를 결성해 들어왔고 남한 측 대표로서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그래서 한반도에 안보관련 문제가 생겼을때 정전 협정의 당사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엔군이 개입을 하지 못한다. 중재는 당사자가 아닌 제3자여야 가능하다. 

 

 

정전협정문 5인 서명 

 

의문 2. 

중국이 정전 협정의 당사자로 들어와 있다. 이유는 1950년 7월 유엔결의안으로 전쟁 발발 직후에는 유엔군 역할을 38선 이남으로 한정했다.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고 38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개전 3개월만에 38선은 이미 회복하며 단번에 전세를 뒤집었다.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인 이유

10월 1일은 한국군이 북진을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을 지정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가기 위해 활동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만들기 위해 1950년 10월 7일, 유엔 총회에서 유엔군의 북진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후 1950년 10월 9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간다. 

 

그러나 중국의 한국 전쟁 개입을 우려했던 유엔군은 북진 11일 만에 파죽지세로 평양을 함락한 맥아더 장군은 중국 국경을 맞댄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그래서 당시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장군을 웨이크 섬으로 불러 회담을 한다.  

 

 

맥아더의 오판

여기서 맥아더의 오판이 있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대규모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중국군이 참전해도 유엔군이 이길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그렇게 맥아더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지만 여전히 중국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중국 참전 과정

1949년 10월 1일 한국 전쟁 발발 9개월 전 건국된 신생국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전쟁에서 진 후 배상금을 지불하면 혁명까지 무산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국내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마오쩌둥과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평더화이가 찬성을 한다. 

 

 

건국 전 북한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했고 북한이 무너지면 그 다음 중국침략이 가능했으므로 안보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때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도움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손편지 

 

전쟁전 지원을 약속했던 소련이지만 막방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미국과 소련이 전쟁시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해 직접적 개입을 피한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마오쩌둥은 편지를 받고 북한을 돕기로 결정한 것이다. (1950. 10.13) 

 

마오쩌둥은 전쟁 지원군으로 중국 국민들도 설득시키기 위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마오안잉)을 참전시키지만 참전 한 달 만에 미군기 폭격으로 사망한다. 

 

마오쩌둥 아들 마오안잉 묘소에 헌화하는 김정은

 

중국이 개입하면서 지루한 고지전이 2년동안 계속되었다. 

 

※정전협상 중 전투를 멈추지 않고 고지전을 계속한 이유 

 

 

 

2년동안 어떤 협상을 했을까?

 

정전 협정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중립국 감독위원회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 북한과 중국이 중립국에 소련을 넣겠다고 한다. 이 문제로 몇 개월을 싸웠다. 

 

그 다음은 포로 문제로 당시 유엔군이 수용한 중국 지원군 포로는 2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군 중에 중국으로 가지 않겠다는 포로가 생기면서 중국이 이를 문제삼았다. 귀환을 거부한 포로 숫자가 전체의 50%나 되었기 때문에 지원군을 보냈다고 했던 중국은 체면이 구겨지는 상황(지원군인이 아니였어? )이 되었다. 이에 소련의 스탈린이 포로문제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전쟁을 계속하라고 중국을 유도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와 미국의 힘을 빼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 묶여있으면 소련은 중부 유렵으로 세력을 넓혀가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계속될 수 있었으나 극적으로 정전협정은 이루어진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죽었고 1953년 1월 20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전쟁을 조속히 끝내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정전협정에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정전 협정이 체결된다. 

 

 

 

정전협상의 결과물은? 

 

급물살을 타고 4개월만에 정전협상을 맺게 되면서 실효성 없는 조항들과 사라져 버린 중재자들 등 불안전한 정전 협정문이 만들어진다.  

 

외부로부터 발전된 무기 반입을 금지하는 조항 

이 조항이 계속되었다면 한반도는 스스로를 지킬수 있는 무기 발전은 이루워질수 없었을 것이다. 이 조항은 3년만에 무효화된다.  1954년 소련의 최신 전투기를 북한이 비밀리에 반입한 것이다. 1954년 9월 21일 이같은 내용을 북한에서 귀순한 노금석 조종사가 전투기를 직접 몰고 귀순해 폭로하면서 유엔군이 이 조항의 무효화를 선언한다. 

 

1954년 9월 21일 북한 조종사가 전투기 직접 몰고 귀순

 

 

정전협정은 국제법인데 처벌조항이 없다. 

그래서 그대신 중립국감독위원회를 만들었고 남측에서는 스웨덴, 스위스 북한 측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남측과 북측의 정전 상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1989년 폴란드가 자유화가 되면서 북한이 폴란드 대표를 내쫓아버렸다. 또한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독립되면서 체코, 슬로바키아 양쪽모두 중립국 감독위원회 활동을 중단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바다 위의 군사분계선이었다. 

정전 협정당시 해상 군사분계선은 복잡하니까 정전 협정 후 나중에 협의하자고 한 이후 합의를 지금까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로인해 1960년대 서해에서 조업하다가 북한 경비정에 납북된 우리 어민들이 많았고 간신히 풀려나도 간첩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았다. 

 

ㅓ바위 불분명한 남북측 북방한계선 

 

당시 유엔에서 북방한계선(NLL)을 그어놓았는데 북한은 이에 자신들만의 해상 경계선을 그어 버리면서 결국 바다 위에 남북은 서로 다른 분계선을 그은 것이다. 그리고 이로인해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날수 있는 지역이 된 것이다.

 

 

 

불안정한 정전협정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북한이 1953년 정전협정을 맺고 처음으로 미국에게 사과한 사건이 도끼만행사건이다. 당시 사건이 고스란히 촬영돼 북한이 발뺌을 할수 없는 상태여서 김일성 최고사령관의 명의로 유엔군에 사과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년 9월 18일 26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강릉 앞바다를 통해 침투해 육.해 공군 150만 명이 투입돼 49일간 소탕작전을 벌였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21 사태 (청와대 기습미수사건)

31명의 북한의 특수부대원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가 실패한 김신조사건이다. 

 

 

남북 간 교전 횟수 

1966년 30회

1967년 400회

1968년 500회 

 

한반도의 안보 위기를 조성해 베트남 파병을 막기 위해 벌인 사건이다.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엔 인공위성이 아닌 선박을 이용해 첩보를 수집했는데 (배들이 국경근처에서 도청을 하는 방식)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정찰 활동 중  북한에 70여명의 선원들과 함께 납포가 된다. 

 

 

 

 

실미도 부대 창설

1.21 사태에 대한 사과를 요구 요청을 미국이 거절하자 보복을 준비한다. 한국의 보복을 막기 위해 미국특사 사이러스 밴스를 보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보복 행위를 일체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미도 부대(684부대)를 만들어 보복을 준비한다. 

 

실미도 사건 684부대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모두 사망한다. 정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한다. 

 

안보위기로 인해 생긴것이 주민등록증이다. 또한 1.21사태를 계기로 서울이 군사분계선과 너무 가까움을 느껴 행정수도 건설이전을 계획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10.26사태에서 암살되면서 전면 백지화가 되었다. 

 

 

평화를 알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 평화가 없으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 개인의 안보, 경제적 번영 모든것이 무너진다.  앞으로는 가슴 아픈 희생이 없도록 현재의 불완전한 정전 체제를 온전한 평화 체제로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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