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는 누구?
명나라 1402년 남경에서 자금성을 지은 3대 황제 영락제가 등극한다. 영락제는 명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일한 주원장의 아들 26명 중 넷째 아들이었다. 주원장의 많은 아들들은 각자의 독립적 영토를 소유하면서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남경에서 멀리 떨어진 북경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영락제였다. 북경의 위에는 몽골세력이 있었고 전쟁에 능했던 영락제는 몽골 세력을 성공적으로 제압을 했다.
정난의 변
그러던 중 1392년 남경에서 영락제의 큰형이자 황태자였던 주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때부터 영락제는 황제의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으나 황제에 오른 인물은 15살이었던 주표의 아들 건문제였다. 이에 불만이 생겼는데 건문제가 심지어 자신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우려 하자 13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전쟁을 일으켰고 1402년 영락제는 수도 남경을 함락시킨 후 자신이 명나라 3대 황제로 등극한다.
쿠데타로 왕이 된 영락제는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해외 원정을 통해 외국에 사신들을 보내 자신을 황제로 공포하였고 명나라의 해외 입지를 다져 황제의 위상도 올리고자 했다. 이는 중국을 세계 중심에 있는 문명적으로 가장 우수한 나라로 여기며 자국 외의 다른 나라는 천시하는 사상인 중화사상에 기인한 것이었다.
정화 원정대
명나라가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막을 건너가야했다. 또한 오랑캐들의 약탈에도 노출되기 쉬웠다. 그래서 바다를 이용해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중요한 임무를 맡은 이가 명나라 환관 정화였다. 정화는 10살 때 전쟁 포로로 잡혀 강제로 환관이 된 색목인이었다. 환관임에도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화가 원정의 책임자로 꼽힌 가장 큰 이유는 무슬림이었기 때문이다. 정화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민자들의 자손이었다. 그래서 이슬람교를 믿고 이슬람어와 풍습에 매우 밝았다.
당시 세계 여러 바다에서 해상 무역을 펼치던 세력이 이슬람 상인들이었기 때문에 무슬림 출신의 정화가 적임자였던 것이다. 정화 원정대의 규모는 축구장 (125m) 보다 큰 선박들이 62척이나 떠다녔다. 정화 원정대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보다 무려 80년을 앞선 항해였다.
1405년 6월 정화의 원정대는 항해를 시작해, 1407년, 1409년 세 차례에 걸쳐서 지금의 인도까지 도달하게 되고 이후 1417년 지금의 소말리아 무가디슈 아프리카까지 도달한다. 7차 원정때는 이슬람 성지 메카까지 도달하게 된다.
정화는 7차례 원정을 떠났고 총 이동거리를 합해보면 18만 5천 km였다. 지구를 4바퀴 반을 돌았다.
조공 무역
정화 원정대의 핵심 목표는 주변국들과 조공 관계를 맺기 위함이었고 원정을 통해 40여 개 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통해 한 해에 천 명이 넘는 사신들이 조공을 받치기 위해 명나라를 방문했다.
조공을 받고 답례를 주는 관계인 조공 무역을 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조공품보다 훨씬 비싼 답례품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조공 관계는 유럽의 잔혹한 식민지 운영과는 비교되는 명나라의 조공 무역이었다. 명나라는 경제적으로는 손해였으나 조공 관계에서 우위에 있다는 명분을 더 중요시했던 것이다. 정화 원정대를 통해 바다에서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명나라가 돌연 바다를 향한 관심을 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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