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2대 왕 정조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가장 휼륭한 임금으로 평가된다. 노비제도 폐지를 추진하고 정약용, 박재가, 박지원등 실학자들을 등용 상업, 유통을 발달시켜 조선의 근대화에 싹을 틔운 임금이다. 그러나 재위 24년 되던 해 정조는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개혁의 절정으로 향하는 순간 임금의 죽음은 많은 논란이 일으켰던 사건으로 여전히 학계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25세에 왕이 된 정조(재위 1776~1800)는 49세에 승하했는데 죽기 전에 정조는 종기 등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영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서적을 많이 읽어 동의보감에 심취 후에 의학서적을 집필한 만큼 의학에도 해박했는데 스스로를 자신이 가슴에 화가 많아 두통과 종기가 생겼다고 정조실록에 기록한 내용이 있다.
정조의 병 원인
임오화변때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도했고, 세손시절에는 살기 위해 숨죽이며 살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세력과 여전히 정치를 해야했기에 이런 상황으로 정조는 자주 아팠고 나중에 그것이 종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조가 독살이 아닌 그냥 아퍼서 사망했다는 학자도 많이 있다.
정조의 노론 견제 정책들
정조의 죽음에 독살설이 가장 무게가 실리고 있는데 당시 정치상황을 보면 노론이 권력을 잡고 있었고 그 중에 노론 벽파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력이기도 하다. 노론 중 시파는 사도세자의 추숭에 찬성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찬성한 정파로 나뉘고 있다.
정조가 임금이 된 첫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천명하면서 그의 정치 인생 내내 노론를 견제하고 그들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수 있다.
비변사: 규장각
18세기 비변사(조선시대 군국기무를 관장한 문무합좌기구)를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비변사를 견제하기 위해 규장각(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을 만들어 서얼 출신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등을 채용해 그들과 함께 정책을 논의하는 비변사 견제용 기관을 만들었다.
초계문신제
초계문신제(과거에 급제한 37세 이하 문신들을 선발해 40세까지 재교육) 를 통해 자신의 세력 시파를 육성했기에 이것 또한 노론견제용이었다.
5군영: 장용영
또한 노론의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 수어청,금위영)을 장악하니 정조는 장용영(왕실 직속 호위부대)를 만들어 5군영의 군사를 흡수하여 점차 규모를 늘려가며 5군영을 견제했다.
신해통공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난전의 상행위를 금지시킬 수 있는 권리)을 철폐시키는 신해통공(1791년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을 실시한 것도 노론의 정치자금을 차단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문체반정
노론들이 남인을 탄압할때 남인의 천주학파들을 보호하기 위해 문체반정(정조가 노론 박지원의 문장들을 패사소품체로 규정, 고문을 모범으로 삼을 것을 명한 사건)으로 노론을 견제
노론 숙청
정후겸, 홍인한, 김귀주(정순왕후의 오빠)를 숙청등을 봐도 노론이 정조를 암살했을 가능성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조의 죽음과 관련된 세 가지 설
과로사설
정조는 하루에 2~3시간을 자면서 과다한 업무를 했고 아무리 아파도 반드시 앉아있었기때문에 과로사로 죽었을 것이다는 얘기가 있다.
의료사고설
의료사고설은 독살설과 이어지는 부분이지만 어의가 정조는 체질이 인삼이 맞지 않는 체질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옥고를 주로 먹었고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죽었다. 설이다.
독살설
1860년 6월달에 정조는 사망한다. 6월 14일~28일의 치료과정에서 나타난 이상한 점들과 정조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을 보면 모두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때문에 정조의 독살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이다.
정조 독살 근거
▶정조가 죽기 전에는 신해박해(1791년)로 정약용, 이가환등의 남인세력이 많이 낙향해있는데 정조는 죽기 두 달전(1800년 5월) 규장각 경연에서 남인을 대거 등용하겠다고 선언, 정권교체하겠다는 뜻인 오회연교를 발표한다.
*신해박해(1791년)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룬 후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워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한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한 사건.
* 오회연교 : 정조가 탕평을 포기하고 자신의 뜻에 맞는 사람들로 조정을 구성할 것을 선언한 사건
▶정조는 전주 출신의 피재길을 정조가 불러서 종기를 치료하게 된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종기를 치료를 했을때 피재길을 노론에 의해 지방의 어딘가에 가 있었고 죽기 6일전에 돌아온 피재길은 더 이상 손을 쓸수 없는 상태였다.
▶이때 내의원을 담당했던 이는 노론의 심환지였고 그는 자신의 친척 심인을 불러 탕약을 제조하기 한다. 이 탕약은 정조의 체질에 맞지 않는 인삼을 넣어 만들어 들었다. 또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수은 처방법(연훈방)을 사용했고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는데 3번정도라 중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때 정순왕후가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고농축의 탕약)을 의관들에게 전달했다는 기록이 정조실록 내용이고, 이만수 행장기록에는 정순왕후가 직접 탕약을 들고 침전에 들어갔고 얼마 후 정조가 승하했다고 울면서 뛰어 나왔다고 한다. 정조의 마지막 말이 수정전으로 정순왕후의 처소가 수정전이었다.
▶ 정조가 죽은 뒤에는 정조를 치료했던 심환지는 영의정이 되었고 정조의 모든 개혁은 중단이 되었다. 또한 정순왕후는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정조가 아끼던 남인들을 신유박해를 통해 숙청을 감행했다.
* 신유박해 (1801) 벽파가 시파의 제거를 위해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대대적인 박해
정약용 형제들과 함께한 조선 천주교 박해 역사(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책롱사건 등)
증거는 찾을 수가 없어 학계는 과로사로 보고 있고 정조가 죽은 다음 정조의 솔메이트 다산 정약용은 어약을 잘못 써서 정조가 죽었다는 내용으로 시를 썻다.
정조가 사망한 후 순조-헌종-철종(1800-1863)에 이르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시기 세도 정치기를 맞이하게 되고 근대화로 나아가지 못한 상황에서 운요호 사건(1875), 병인양요(1866) 등 제국주의 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고 이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면서 경술국치(1910)까지 결국 조선은 망하게 된다.
창경궁 속 사도세자의 죽음 (영화 사도의 임오화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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