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와 문화의 중심 교토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일본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다. 그런데 나가사키 대신 교토가 원폭 투하지역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헨리 L 스팀슨 장관이 교토 원폭투하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토를. 파괴하며 일본인의 반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이 아니라 소련에 더욱 호감을 느낄수 있다고 생각, 종전 후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판단해서 였다고한다.
그리고 50년 뒤 1994년 교토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었다. 17개의 세계유산을 품고 있는 일본문화의 정수가 담긴 도시이자 정신적인 수도이자 유네스코가 인정한 도시, 레몬 소바 유명한 곳 일본 교토이다. 교토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일본 사람들이 전쟁하면 2차 세계대전을 말할때 교토사람들은 전국시대 전쟁을 이야기 할 정도이다.
교토 역사의 시작
천황이 거주하는 곳을 미야코 (수도) 라고 부르는데 794년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를 한 이후에 1000년이 넘게 무사정권의 교체는 있었지만 천황의 거주지는 변함이 없었다. 794년 간무 천황은 나라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기고 헤이안 시대가 열린다. 천년 수도 교토 역사의 시작이었다.
나라->교토 수도천도
2002년 아키히토 천황은 자신의 선조 중에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인터뷰를 했다. 이것은 공식석상 최초 간무 천황이 백제계임을 밝힌 천황이었다. 간무 천황은 어머니가 도왜인 (주로 5~6세기) 무렵 중국,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후원할 정치적 기반이 약했고 당시 일본의 수도 또한 '나라'였기때문에 나라시대는 막강한 불교세력의 영향력 행사로 조정 정치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때문에 간무 천황은 정치력 회복을 위한 승부수로 나라=> 교토로 수도천도를 했다.
가마쿠라 막부
교토 천도 초반에 개혁적 정치 시행으로 천황의 정치력은 많이 상승되었으나 그 이후 유력 귀족가문의 득세로 천황의 영향력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 상황과 천황의 배후세력으로 교토에 대거 진출한 지방무사들의 영향력이 높아지고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사무라이 영향력이 높아짐에 따라 막부가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기 시작했고 실권을 잡게 된 막부였다.
교토 금각사 (무로마치 막부)
가마쿠라 막무 이후에 14세기 초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마쓰의 경우는 공가(귀족), 무가(무사) 사원(불교)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천황의 거처 근처로 쇼균의 거쳐를 이동시켜 천황과의 관계에 힘을 썻고 교토 기타야마에 별장을 지어 권력 과시를 위한 금박을 두른 별장이 바로 금각사이다.
해가 좋은 날은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는 금각사이다. 진짜 금이다. 1950년 금각사가 화재 사고가 있었는데 복원 공사에 사용된 금이 무려 20KG 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18억정도로 가로 10 x 10cm 20만 장의 금박을 옻칠해서 만든 것이다. 당시 막부의 권위와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 건물이다.
1,2,3층의 건물 양식이 조금씩 다른데 금각사 1층은 공가(귀족)의 주택 양식을 반영했고 2층은 무사주거 양식을 반영, 3층은 사원 양식의 반영이다. 1층 귀족 양식은 빛과 바람을 들이는 문, 2층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미닫이문 설치되어 있고 3층은 불가 양식 선종의 영향, 동그란 창문을 설치되어 있다. 교토 문화의 총집합체가 금각사이다. 막강한 군사력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을 포용하는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1976년 신안 앞바다 해저에서 발견된 무역선에는 중국의 도자기, 동전 등 여러 가지 보물이 들어있던 신안선은 교토로 가고 있었는데 신안선 목간(=택배송장 역할)에 따르면 교토의 도후쿠지(동복사)로 보내질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이었던 것이다. 당시는 조공무역의 형태로 중국에 공물을 보내고 회사품을 받는 형태의 무역이었다. 1404년 이후 중국과의 감합무역을 통해 이득을 본 막부였다.
가래산스이식 정원
교토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것에는 일본식 정원이 자리잡고 있다. 물이 없이 물을 표현했다는 일본어 가래산스이, 영어로는 Japanese dry garden이다.
한국의 정원은 경치 좋은 곳에 물이 흐르는 곳에 정자를 만들고 감상하는 정원을 만든 반면 일본 가레산스이식 정원은 담장 안에 돌과 모래를 이용해 조성해서 정원에 들어가지 않고 차를 마시거나 좌선을 하면서 감상하는 정원이다.
이 정원은 무로마치 시대에 선종이 융성하면서 발전했고 참선을 중요시하던 종교로 정원 조성 또한 선종 수행법의 하나로 정원도 요란하거나 산만하지 않게 차분한 분위기의 선의 메세지가 담겨 있는 가레산스이식 정원이다.
일본사람들은 정원을 예술분야로 생각하는 면이 있는다. 다도, 명상과 함께 예술을 보듯 정원을 감상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모래에 반사되는 간접 조명으로도 사용되었다.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막부 장군의 후계문제를 둘러싸고 1467년~1477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란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로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설립할 때를 마지막으로 130년의 기간을 전국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교토 정비 사업은 교토 주의에 23km 길이의 성벽을 건설하고 사찰을 한쪽으로 모아 거리를 조성한 거리를 테라마치(절이 모여 있는 거리)가 아직도 있다. 지금의 우리나라 인사동 거리같은 거리이다.
에도 막부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전쟁 중 병으로 사망하면서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수립된다. 그래서 일본의 정치적 중심지는 교토에서 에도(도쿄)로 옮겨진다. 정치중심지 에도, 경제 중심지 오사카, 역사문화전통의 중심지 교토 3개의 도시를 3도라고 불렀다.
니조성
에도막부 입장에서는 천황과 공가(귀족)세력을 감시 목적으로 교토 시내에 니조성이라는 성을 건설했다. 니조성에 있는 우구이스바리라는 것이 있는데 꾀꼬리 마루라고 불리는 것으로 밟으면 새소리가 나는 마루이다. 당시에는 천황과 막부의 권력 싸움 중 암살 위협에 대비하여 만든 장치이다. 이 기술을 익히려면 3대에 걸쳐 익혀야 하는 어려운 기술이다. 천황의 거처가 아니라 천황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니조성인데 당시 천황과 막부의 권력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868년 에도시대가 막을 내린다. 메이지 천황과 새 정부는 황실을 도쿄로 옮기는 등 사실상의 천도를 추진한다. 1869년 천황은 교토에서 에도로 거처를 옮긴다. 1871년 교토 역사적 장소 보존에 대한 조례를 발표되면서 지금의 교토가 잘 보존 될수 있었던 배경이 된다. 10년 전만해도 일본인이 선정 살고 싶은 도시 1위가 교토였다.
그러나 10년동안 교토의 노령화가 진행되면서 보건, 복지에 큰 비용이 사용되고 재정이 악화되었고 항상 관광객들이 붐비는 관광도시 교토로 오버투어리즘 즉 수용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관광객이 관광지로 몰려들면서 관광객이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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