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

인천상륙작전 크로마이트 뜻 , x-ray 작전, 켈로 부대

by 365 ^^ 2023. 9. 13.

[이전글] 영천 전투 : 뉴 코리아 계획을 무산시키다.

 

크로마이트 뜻 

통영 작전, 영천 전투는 수비일 뿐 여전히 상황의 역전은 아니었다. 여전히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크로마이트의 뜻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군사 작전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짓는다. 작전을 유추할 수 있는 단어 절대 금지이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5일 크로마이트 작전을 개시한다. 새벽 2시 20분 월미도를 향한 대규모 포격이 시작되고 261척의 함선에서 함포 사격과 항공 폭격이 4시간 넘게 이어진다. 9월 15일 오전 6시 33분경 드디어 상륙을 시작했다.  성공 확률 5000분의 1(0.02%)을 뚫고 전쟁의 양상을 바꾼 것이 인천상륙작전이다. 

 

상륙작전의 후보지들

 맥아더 장군은 모두가 반대했던 작전에 끝까지 고집을 꺽지 않았다. 남침 한 달만에 낙동강까지 밀린 상황에서 적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방법은 보급로의 차단이었다. 그래서 인천에 상륙 후 서울을 점령하고 북한군 보급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당시 상륙잔전 후보지로 군산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륙작전 수행하기는 군산이 조건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상륙작전을 성공했을 때 효과가 더 큰 곳이 인천이었던 것이다. 군산에 상륙이 더 편하고 안전했으나 북한군의 보급선을 절단하려면 군산이 인천보다 못 미쳤던 것이다. 또한 적을 포위하기 위한 효과가 없었다. 원산과 평택도 거론되었으나 역시 원산의 험준한 산맥과 평택은 너무 남쪽이라 인천 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서울을 통과하는 보급로 

 

인천 상륙작전 반대 이유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컸다. 조수간만의 차가 무려 9m 나 되었다. 크고 묵직한 미국 구축함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은 갯벌에 조개를 주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만조시간에 물이 차는 속도보다 사람 걷는 속도가 더 느려 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한 시간은 아침저녁으로 각각 3시간 정도였다. 

 

 

또한 인천 월미도는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처럼 평평하지도 않았다. 방파제와 돌 축대가 있는 해안가여서 사다리를 놓고 올라와야 했다. 

 

이런 이유로 북한측에서도 상륙작전의 대가라도 인천은 안 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자연조건을 봐도 인천은 불가능 위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인천으로 가야 한다는 한다. 

 

 

X-Ray 작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영흥도 월미도 등 주변 섬에 북한군의 규모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산에서 해군 첩보부대가 인천 영흥도로 출격한다. 첩보부대는 기뢰 (함정의 접촉, 자기나 음향 등에 감응해 적의 함정을 파괴하는 수중무기) 정보를 알기 위해 쌀 70 가마니를 가지고 간다. 주민들에게 쌀을 주고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당시 월미도에 북한군의 해안방어지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 군은 무기의 종류, 병력규모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북한군 실태 파악이 가장 먼저 파악해야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해안포 위치, 병력 규모 등 상륙에 필요한 핵심 첩보 파악에 성공한다. 그리고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 이 첩보부대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다. 

 

 

이때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를 포함한 6명은 첩보작전 마무리를 위해 영흥도에 잔류하게 되고 첩보작전을 북한이 알게 되면서 9월 14일 영흥도를 북한군은 공격한다. 북한은 1개 대대 병력을 투입해 이들을 쫓았고 첩보부대는 도주로를 미리 확보해놨으나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는 남아서 북한군을 저지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포위당하고 17명의 해군첩보부대와 임병래 소위, 홍시욱 삼등병조의 희생으로 인천연합군은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가 획득되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는 계산이 가능하지만 바닷속 상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해저지도 없이는 상륙작전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또 하나의 특수부대를 투입한다. 

 

켈로부대 

KLO 부대 켈로부대였다. 이들은 군번이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미국 극동사령부의 첩보, 게릴라 부대로 주 임무는 대북 첩보였다. 1948년 북쪽 지리에 능통한 이북 출신 한국인들로 구성되어서 북한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들의 활약은 대단해서 맥아더 장군의 자서전에도 나온다. 켈로부대는 두 번 명령이 필요 없으며 한 번 지시에 완벽한 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당시 보여준 이들의 활약은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언급한다. 맥아더 장군도 극찬한 켈로 부대의 활약은 해도를 만들기 위해 무동력선을 타고 밤에 바다로 나가서 수심을 체크했다. 쇳덩어리에 밧줄을 묶어 일일이 그것을 바닷속에 넣어 체크했다. 

 

켈로 부대원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월미도에 들어가 북한군 배치와 탱크의 위치를 파악한다.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주며 중요 정보를 얻었다. 정보를 취합 후 월미도 및 인천 시내의 북한군 배치도를 완성했다. 이렇게 해도를 완성 후 최적의 날짜를 계산한것이 1950년 9월 15일이었다. 

 

 

▼인천 상륙작전 2단계로 이루어졌다. 

 

 

인천상륙작전 속 월미도에서는 무슨일이? (팔미도, 월미도 작전)

6.25 전쟁의 터닝 포인트 인천 상륙작전은 작전 자체가 위험한 작전이었다. 보급이 어려운 작전에서 적진의 한복판으로 돌격하여 수만 명의 군인이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반대했던 위험

myvoice.wissue.net

 

댓글